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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엘에이 폭동과 민들레
작성일
2022.12.13

일반산문 부문(체험수기) 우수상


엘에이 폭동과 민들레

조 성 환 (미국)


‘Life‘s full of bumps(삶은 온통 시련으로 가득한 것)’


엘에이 4.29폭동 30주년 기념식 참석차 한국문화원으로 가던 중이었다, 105번 서쪽에서 110번 북쪽으로 바꿔 타는 프리웨이 고가다리 난간에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한 문장을 보았다. 근처 도로변 풀밭에 몇몇 홈 리스 텐트가 보였다.


어떤 사람일까, 삶의 신산함을 짧은 한 문장으로 흩뿌려 놓은 이는.


기념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운타운의 7가와 샌 피드로 스트리트 부근, 허름한 공장이 밀집한 빌딩 숲을 지날 때였다. 어디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한 블록 위엔 노숙자들의 텐트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곳. 나는 소리를 쫓아 골목길로 들어섰다. 빌딩과 빌딩 사이 한구석에서 허름한 중년 흑인이 트럼펫을 허공에 올려 대고, 니니 로소의 ‘밤하늘의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나는 멀찍이 차를 세우고 그의 연주를 들었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은 실력이었다. 해거름의 옅은 햇살에 트럼펫이 반짝였다. 적막만 내려앉은 거리에서 세상 속에 섞이지 못한 그의 고단한 영혼을 달래듯 골목을 휘감고 도는 트럼펫 소리. 돌아오는 길 내내 그의 모습이 따라왔다.


살다 보면 누구나 사방의 벽이 캄캄할 때를 만난다. 다리 난간에 낙서처럼 절창의 문장을 써 놓은 사람이나 트럼펫을 잘 다루던 사람도 한때가 있었을 것이고, 또 한때를 놓친 사람일 것이다.


나의 이민 역사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이곳에 오기 전 한국에서 들었던 어느 세월 좋은 사람의 낭만적인 노래가사에 나성은 지상 낙원인 줄 알았다. 막상 이곳에 첫발을 디딘 사람에게는 꿈이 확 깨는 오아시스 같은 노래였다. 그 노랫말이 다시 들리기까지 오랜 세월을 허덕여야 비로소 귀에 찾아오는 소리였다.

미국에 온 지 8년 만에 흑인 빈민 지역에 리커 스토어를 인수했다. 그 업체를 갖기까지 8년은 사철 내내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는’ 사막의 땅 엘에이에서 온몸으로 햇빛과 맞짱을 뜬 기간이었다. 몇 년은 주유소 펌프맨으로, 몇 년은 정원사로 햇빛과 싸웠다. 그즈음은 한국에서 온 이민자라면 누구나 다 그만그만한 세월의 언덕을 힘겹게들 넘었다. 힘겨웠다고는 하지만, 꿈이 있었으니 힘겨운 것쯤이야 능히 견딜 수 있었다.


한인 사업가들은 비교적 심성이 착하고 다루기 쉬운 흑인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빈민이 많아 정부에서 생활 보조금을 받는 이가 많았고 그렇게 받은 돈을 흑인들은 헤프게 풀었다. 기대한 대로 장사는 잘되었다. 미국으로 온 지 10년 만에 비로소 안정을 찾기 시작한 어느 날, 흑인 밀집 지역인 사우스센트럴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한국인의 사업장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이 사태의 발단은 폭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 경찰의 불심검문에 불응하고 달아나던 라드니 킹이라는 흑인 청년을 붙잡아 4명의 백인 경찰이 무차별 폭행했던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시민이 찍은 폭행 장면이 담긴 동영상에는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적 패악성이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흑인들의 공분을 샀던 이 사건은 네 명의 백인 경관에 대한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이 나자 분을 참지 못한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폭도로 변한 사건이었다. 치안 공백이 된 엘에이 사우스 센트럴지역에 흑인들은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고 2,300여 군데의 한인 업소가 피해를 보았다. 폭도로 변한 군중은 한인 업소를 주 타깃으로 여겼다. 흑인들이 한인업소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라드니 킹에 대한 구타 사건으로 흑인사회가 울분과 분노로 들썩이던 2주일이 채 안 된 하필이면 그때, 흑인 밀집 지역의 한 마켓에서 물건을 훔친 것으로 의심받던 나타샤 할린즈라는 15세 흑인 여학생이 한인 여주인이 쏜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도 배심원단의 피의자에 대한 유죄평결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 판사는 한인 업주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백인 여성 판사는 그 사건의 정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한인 업주의 손을 들어줬는지, 한인을 개입시켜 백인과 흑인 간 일촉즉발의 위기를 한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물꼬를 틀 계산된 판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일 한인 업주에 대한 법원 판결이 좀 더 상식적인 접근을 했었더라면 폭동의 성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또한 알 수 없다. 결과적으로 그 판결은 한-흑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한 단초가 된 것만은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폭동이 있던 그날도 여느 때처럼 나는 새벽 장을 보러 나섰다. 잔뜩 구름이 내려앉은 날씨가 이날 있을 라드니 킹에 연루된 경찰관들의 배심원 평결을 앞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도매상을 찾은 한인 마켓 업주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두어 시간 앞으로 다가온 라드니 킹의 평결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 상인들은 평결을 앞둔 며칠 전부터 흑인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차하면 들고 일어날 기세로 흑인 커뮤니티가 벼르고 있는 분위기는 신문이나 방송이 아니더라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도매상에 모인 상인들과 나는 이 긴장 속에서도 엘에이의 강력한 경찰력을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헤어졌었다.


쇼핑하고 온 물건을 가게에 부리고 있을 때였다. 라디오에서 라드니 킹 배심원단이 폭행을 가한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는 속보가 나왔다. 설마 했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라디오에는 엘에이 사우스 쪽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업주들은 각별히 주의하라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종업원들과 함께 물건을 정리하던 나는 종종 마켓 밖을 나가 동정을 살폈다. 대로가 아닌 동네 길이라고는 해도 평소와는 달리 지나가는 차가 현저히 줄어있었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거리는 을씨년스러웠고 검은 비닐봉지가 간간이 부는 바람에 낮게 떠서 날리고 있었다.


시위나 폭동을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그래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치안을 담당하는 공권력을 믿고 싶었다.


“쟌, 티브이 켜봐. 놀맨디에서 사고가 터졌어.”


동네 주민인 페드로가 달려와서 다급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티브이를 막 켜려던 참이었다. 티브이에서는 내가 운영하는 리커 마켓과 지척 간인 놀맨디와 플로랜스가 맞닿은 사거리에서 대형 트럭을 모는 백인 운전사가 흑인들에게 끌려 나오는 장면을 반복해서 방영하고 있었다. 이미 긴장된 마음에 이 상황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흥분해 있는 군중이 저 운전사를 온전하게 내보낼 리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문득, 나는 경찰력이 세계에서 최고를 자랑한다는 이 땅에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방송사 헬기에서 찍은 영상에 경찰차는 보이지 않았다. 전 같았으면 방송사 헬기가 떠서 촬영할 정도면 헬기보다 먼저 와 있던 것이 경찰차였다. 흑인들 손에 끌려 나온 백인 운전사가 몰매를 맞고 있었다. 백주 대로에서, 시민이 폭행당하는데도 경찰이나 구급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게 밖은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디를 가는지 모를 젊은 흑인이 가득 탄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거리를 질주하는 것이 더러 보였을 뿐 일반 차량의 통행은 보이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이 가슴을 짓눌렀다. 업주들은 신속히 대피하라는 엘에이 경찰국의 포고령을 티브이에서 속보로 전하고 있었다. 헬기에서 촬영하는 영상에는 최초의 폭행 사건이 일어난 놀맨디와 플로랜스가 만나는 거리에 시위대가 운집해 있는 모습에 앵글을 맞추고 있었다.


“쟌, 왜 문 안 닫고 여태껏 이러고 있어! 방송 안 들었어?”


몇몇 동네 사람이 가게로 찾아와 나의 굼뜬 행동을 나무랐다. 나는 소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차라리 종업원과 동네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가게를 지키는 것이 피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불화살을 쏘아대는 캘리포니아의 태양에 맞섰던 8년 만에 일군 삶의 터전을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들어 있었다.

갑자기 무리 지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적막만 무겁게 깔려있던 차도에 하나둘 모이던 인파가 순식간에 밀물 들어오듯 불어났다. 그때까지 가게에 머물며 사태를 살피던 흑인 종업원인 게리와 엘살바도르인인 까롤로스가 겁에 질린 듯 가게 문 닫기를 재촉했다. 나의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여유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초를 다투어야 했다. 순식간에 군중으로 변한 인파에서 분노에 찬 구호가 악다구니처럼 들렸다.


‘쳐들어가자, 베벌리로!’


더러는 누런 박스를 뜯어 엉성하게 매직펜으로 ‘베벌리로 가자’는 선동 글을 적은 피켓을 들고 고함을 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위의 대상은 백인을 향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엘에이 서쪽에 위치한 베벌리힐스와 할리우드 지역은 상류층인 백인이 사는 지역이다. 그곳은 흑인들에겐 상대적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질시의 땅이었다. 흑인들은 그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가게를 지키려던 마음도 엄습해오는 공포와 현실적인 상황을 이겨내지 못했다. 황급히 가게 문을 닫고 차에 올랐다. 차도에 들어찬 인파로 차가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운전석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누군가가 군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여기, 퍽킹 코리안이 있다!”


몇이나 되는지도 모를 눈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차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운전자를 쳐다보던 누군가가 차 문을 열려고 시도했고, 문이 열리지 않자 주먹으로 창문을 쳐대었다. 누군가는 욕을 해대며 차체를 발로 걷어찼고, 차를 마구 흔들어대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했다. 이 시위는 백인만을 성토하려는 게 아니었음을 알았다.


나는 이미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도 ‘침착하자. 침착하자’를 주문처럼 외웠다. 만일 이곳에서 끌려가면 백인 트럭 운전사처럼 목숨을 담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불안한 내색을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군중심리의 빌미를 줄 수도 있을 터였다. 속내를 감추고 태연해지려 애썼다.

간신히 큰길을 피해 좁은 동네 골목길로 들어섰다. 마의 소굴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인파가 몰려 있지 않은 골목길을 골라 다니며 어렵게 프리웨이 근처에 다다랐지만, 대로를 가로질러 프리웨이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흥분한 군중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인 방송사인 ‘라디오 코리아’에서는 실시간으로 급박한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며 사우스 엘에이 쪽의 업주들은 신속히 빠져나오기를 거듭 촉구하는 경찰청 포고문을 계속 전하고 있었다.


궁리 끝에 뒷좌석에 있는 물건이 든 작은 종이 상자를 꺼내어 ‘아베아무스 아미고! (Abeamus amigo! 동지여! 앞으로 나가자)’ 라는 글자를 볼펜으로 덧입혀 선동 글귀를 적었다. 일테면 라티노로 행세하며 동류의식을 유발하는 속임수를 쓸 작정이었다.


볼펜의 심을 뽑아 손바닥에 잉크를 빼내 덕지덕지 얼굴에 바르고, 마시다 남은 물을 머리에 부어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얼추 궂은일을 하는 라티노 노동자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청년 때부터 불만이었던 곱슬머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를 구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그 방법은 통했다. 차를 앞으로 나가면서 운전석 옆 차창을 조금 열어 손에 든 팻말을 흔들어가며, 아베아무스 아미고! 하고 히스패닉 말로 소리소리 지르는 것으로 공포심을 삭여냈다. 흥분한 군중이 ‘와, 와’하며 화답을 하는 사이 바람을 타고 앞으로 나가는 돛배처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밀리듯 나갔다. 불과 몇 십 미터도 안 되는 건너편 프리웨이 진입로에 간신히 닿았지만, 입구에는 통행금지 차단막이 싸늘하게 처져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능청스럽게 시위대와 맞장구를 쳐가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가다가 마침 오른쪽에 나 있는 동네 진입로로 자연스럽게 빠졌다. 대로를 건너 민가 옆으로 난 작은 동네 길로 들어서서 폭풍의 핵을 벗어나 로컬 길로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여러 곡절을 거쳐 집에 도착한 나를 사색이 된 가족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막 세 살이 된 딸아이를 덥석 품에 안자 비로소 눈가가 핑 돌았다.

이 폭동으로 한인 상권이 밀집해 있던 사우스 센트럴이 불바다가 되고 대다수 한인 사업체가 재로 변했다. 나는 타다만 가게 건물 벽에 기대어 뉘엿뉘엿 흘러가는 구름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허무했고 막막했다. 그때 내 눈을 밝혀준 것이 시멘트 바닥 사이로 노란 꽃을 피워 올린 민들레였다. 눈이 번쩍 뜨였다. 저, 억척! 저런 억척이면 된다. 민들레를 닮으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처져 있던 마음이 불끈 용기가 솟았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타다 만 가게를 개축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 가까이 혹은 멀리 떨어져 있던 동종의 가게들이 불타고 사라진 후여서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폭동이 지나간 흑인 동네는 잠시 평온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였다. 백인 경관들의 무죄 평결에 여전히 흑인사회가 불만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해에 재심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최초 흑인 폭동에 호되게 당한 한인 업주들도 총기류를 점검하고 당하고만 있지 않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형이 걱정스러운 남동생은 오래된 실탄을 바꿔 장전하라고 45구경과 38리볼버 권총의 총알을 새로 사 왔다. 나는 45구경은 허리벨트 뒤에 꽂고 38리볼버는 계산대 밑에 놓아두었다.


흑인사회는 여전히 불만의 기류가 감돌았다. 이른 아침에 도매점에서 사 온 물건을 종업원들이 진열하는 사이 나는 계산대 앞에 있었다. 그때 스무 살도 채 안 된 것 같은 흑인 청년 하나가 들어오더니 다이스(주사위) 한 짝을 요구했다. 계산대 뒤에는 잡화 종류가 다양하게 걸려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뒤돌아서 주사위를 집어 뒤돌아섰을 때였다. 아이가 시커먼 총을 나에게 겨누고 있었다. 꼭 장난 같은 생각이 들어 “에이 가이, 치워!” 나는 손으로 총구를 치우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이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면서 총구를 흔들어대었다. ‘핸샵, 핸샵! (hands up!)’ 나는 비로소 그가 말로만 듣던 강도인 줄 알았다. 총구가 눈에 아른거린 후였다.


아이가 계산대를 점프해서 들어와 계산대 밑에 있는 권총을 수거했으며 내 바지 주머니를 툭툭 건들며 총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마침 물건을 부리느라 굵고 넓은 허리 보호대용 가죽 벨트를 해서 등 뒤에 45구경 권총이 있는 걸 그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아이가 총을 쥔 채 계산대에 돈을 빼고 돈을 감춰둘 만한 곳을 뒤지는 동안 나는 충분히 허리 뒤의 총을 꺼내 발사할 수 있었다. 짧은 찰나,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통계에는 4.29폭동을 전후해서 만여 개에 달하는 한인 업체에서 연 30명의 강도에 희생된 한인 업주가 발생했다고 한다. 희생자 대부분이 놀라서 비명을 지르던 여성이거나 강도에 대항하다 당한 케이스였다.


저 아이가 몇 푼 안 되는 돈만 가져간다면야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저도 잔뜩 긴장한 터라 여차하면 총질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순간 딸아이의 해맑은 모습이 떠올랐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많은 갈등을 했다. 그렇다고 내 손으로 사람을 쏘아 죽여?


그러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총을 빼 들었고 그에게 쏘았다. 틱! 불발이었다. 그 소리에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아, 나는 죽었구나. 나는 그가 내게 총을 겨누고 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번개같이 몸으로 그를 덮쳤다. 둘이 엉겨 붙었고 호리호리한 아이여서 무술 유단자인 내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뭘 어떻게 다뤘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격발이 불발되자 그때부터 나는 캄캄해져서 정신이 없었다. 그 아이도 불시에 덮친 나로 인해 총을 떨어트린 것만 명료하게 기억에 남았다.


나와 옥신각신하던 강도는 돈과 총을 팽개치고 계산대를 넘어 달아나다가 출동한 경찰에 잡혔다. 불발된 실탄은 규격이 다른 것으로 동생이 잘못 사 온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고 나도 죽지 않았다. 그때 총알이 발사되고 그가 죽었다면 나는 평생을 미국에 온 걸 후회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후유증은 무서웠다. 사고 당일은 무덤덤하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흑인 아이들이 다 강도 같아 보였고 계산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만 가도 머리끝이 곤두섰다. 대략 3개월 정도는 계산대 근처에 가지 못했다. 장사가 잘된다고 했더니 호사다마라는 사자성어처럼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라드니 킹 사건의 재심에 몇몇 백인 경관이 유죄로 뒤바뀌자 비로소 흑인 촌이 조용해졌다. 이 사건이 일단락되자 흑인 촌에도 한인업소에도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 같은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온종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로 늦은 밤의 점포 안은 나와 종업원 외에 손님이 없었다. 이런 날은 특히 조심해야 하는 때이기도 했다. 그때 열여섯 일곱 살쯤 된 앳된 흑인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곧장 맥주를 진열해 둔 냉장고에서 두 병의 맥주를 들고 나왔다. 창고로 통하는 뒷문 옆에 있던 내가 물었다.

“에이, 가이 너 몇 살인데?”
“열여섯.”
“넌 미성년자야. 못 팔아.”
“와이 낫?”
와이 낫은 무슨 와이 낫이야, 가게에서 나가! 맹랑한 놈 같으니라고.

그가 씩씩거리며 나가자 종업원과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오면서 옆구리에 찰싹 붙여서 감추고 들어온 ‘우지’라고 하는 기관단총을 꺼내 잽싸게 내게 겨누었다. 30센티미터 보다 약간 긴 총에 짧은 총열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몸을 피할 겨를도, 허리 뒤에 총을 꺼낼 겨를도 없이 ‘어’ 하는 순간에 그가 총을 쏘았다. 틱, 불발이었다. 그 순간 총을 꺼내든 나보다 먼저 문을 열고 나간 아이와 곧이어 들리던 액셀레이터 밟는 자지러지는 소리. 순간적인 일이었다. 귀에 남아 있는 ‘틱’ 소리는 전에 강도 사건 때 내가 쏜 총의 불발 소리와 같았다.


나는 그날 집으로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저 기관총의 불발이 일부러 나를 겁주려고 의도한 것인지, 실제로 불발된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엘에이에는 파란색을 상징으로 하는 ‘크립스’와 붉은색을 그들의 이미지로 하는 ‘불러즈’라는 악명 높은 두 라이벌 갱단이 있다. 툭하면 총질로 싸우고 죽이는 집단인데 이들이 갱단에 가입하는 신참내기 아이들에게 강도짓을 시키거나 라이벌 갱단에게 총질시켜 담력을 키운다고 한다. 그게 어떤 것이든 나의 결론은 불발이었다. 겁주려고 저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짓을 할 리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혹시 지난번 강도 사건 때 한 목숨을 죽일 뻔했으나 불발된 인과의 결과는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나는 또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서늘해 왔다. 이것은 내 삶에 대한 몇 차례의 경고가 아닌가를 생각했다.


‘그래, 접자.’ 이것만이 내가 해야 할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를 믿고 있는 내 가족, 특히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라도 내 몸부터 잘 지켜야 할 의무가 내게 있는 것이다. 나는 그후 쌍권총 차고 벌어 놓은 돈을 새 사업을 하면서 탈탈 털렸다. 그랬음에도 불멸의 의지인 내 친구 민들레의 교훈으로 다시 일어섰고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군락을 이루면 몸 사리지 않아도 된다
어깨를 걸고 숲을 만들어 놓으면
더 이상
외롭다거나 슬프지 않아도 된다
대궁을 키워 올려 출가시킨 여린 손들
바람은 제 새끼마냥 등에 태워 데려갔지
언덕길
후미진 빈틈 낮과 밤이 어두운 곳에

잡풀이라고 눈 밖으로 밀려난다 한들
앙앙 되던 새순들이 햇살 비낀 음지에도
보란 듯
억척스럽게 밀어 올린 질긴 참견

언덕배기 길옆에 길게 성을 구축하고
마침내 이룬 일가 황색기 세워 박고
하나, 둘
등불을 켠다 몸 시렸던 거리에


<민들레를 보고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쓴 시조. 2016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민들레 촌’으로 신인상>


아직 제대로 말문이 틔지 못한 두 살짜리 손녀의 손을 잡고 햇볕 내려앉은 뒤뜰을 거닌다. 화단 끝머리 담 밑에 한 무리의 민들레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손녀와 함께 나는 민들레꽃 앞에 오래 머물렀다. 활짝 핀 노란 민들레꽃은 잘 웃는 손녀의 얼굴을 닮았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던 평화가 비로소 내게 찾아왔다. 40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