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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한겨울의 외출
작성일
2022.12.13

단편소설 부문 가작


한겨울의 외출

김 미 영 (스웨덴)


은성은 어렴풋이 잠에서 깨 창이 있는 쪽으로 몸을 뒤척였다. 알람시계가 아직 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새벽 다섯 시 전일 것이었다. 커튼 자락 사이로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방안으로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은성은 침대 옆에 놓인 탁자 위로 손을 더듬어 어젯밤에 작동해 두었던 시계의 알람 버튼을 눌렀다. 바깥바람을 한 번 쐬기 위해서라기에는 너무 이른 기상이었고 귀찮은 외출이었다. 은성은 자신의 체온이 남아있는 자리에서 몸을 빼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 을씨년스럽게만 느껴졌다.


정순은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로 살지 말자.”고 말했다. 그 말이 사뭇 비장하게 들려 은성은 정순의 말끝에 짧게 웃었다.


“드라마 엑스트라로 한 번 출연하면 강물로 도도하게 흐를 수 있는 거야?”

“여기는 고인 물이야. 은성이 네 처지는 더 그렇고.”

“내 처지가 뭐? 결혼도 안 하고 직장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라서?”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미란 씨의 말에 네가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서 네가 마치 움푹 파인 물웅덩이에 갇힌 방개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미안해, 이렇게 말해서. 그러니까 내 말의 요점은 나랑 같이 엑스트라를 해야 한다는 거야. ”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을 알고 지낸다는 지인에게서 한국인 보조 출연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해 들은 정순은 자신이 출연하기로 결정한 것은 물론 은성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미리 말해놓고는 관심 없다는 은성을 며칠 내리 졸라댔다. 처음에는 설득의 내용이 단순히 언제 이렇게 재미있는 경험을 해보겠냐는 것이었지만 미란과 만남을 가진 후에는 물웅덩이와 방개 운운하며 생활의 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단언했다. 결국 은성은 정순과 함께 드라마 제작 사무소로 찾아가 조연출인 화니를 만나고 촬영에 필요한 의상과 시간, 장소 등에 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드라마 출연을 위해 직장에 휴가까지 미리 신청해 놓았던 정순은 촬영 전날 오후부터 겨울철에 유행하는 장염에 걸려 집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었고 정순이 강조하던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나 흥분 같은 것이 없었던 은성은 혼자 겨울 새벽의 뿌연 안개를 헤치며 먼 곳의 촬영장을 찾아가야 했다.


은성은 욕실 천장의 전등에서 내리비치는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은성은 아무리 카메라가 머물지 않을 얼굴이라고 해도 다음 날 새벽에 외출할 상황인데도 전날 밤에 굳이 라면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던 자신을 한심해했다. 한밤중에 라면이나 국수를 먹고 싶은 증상이 공복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인 허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은성은 번번이 면의 유혹을 끊어 내지 못했다. 은성은 부어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몇 번 두드렸다. 그리고 양손의 검지손가락을 눈 아래에 대고 눈꼬리 쪽으로 밀어내면서 눈 밑을 팽팽하게 당겨 보았다. 혹시라도 카메라에 얼굴이 잡히면 큰일이었다. 은성은 미란 때문이 아니라면 드라마 출연에 대해 정순에게 설득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또 한 명의 또래가 스톡홀름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정순과 함께 미란을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미란은 드러내놓고 상대를 관찰하는 눈빛으로 은성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김은성이란 이름을 홍마담에게 몇 번 들었어요. 제가 홍마담 친구거든요.”


미란이 다른 누군가에게서 은성의 이름을 들었다고 했다면 은성이 자신에 대해 무엇을 들었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홍마담에게서 들었다면 그건 얘기가 달랐다. 홍마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오래전 불쾌감이 시간의 두터운 층을 뚫고 스멀스멀 뻗어 나와 은성의 얼굴을 달구기 시작했다. 홍마담을 보지 않고 지낸 지 거의 십 년이 되어 갔지만 그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여전히 경기를 일으킬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그녀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은성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은성은 스스로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을 툭 던졌다.


“뭐라고 하던가요?”


“굉장히 자주 말했는데 매번 같은 얘기였어요. 김은성 씨가 여기 어떤 조직에서 일하면서 시스템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면서요? 김은성 씨가 남의 말 안 듣다가 조직에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다는 그런 얘기죠.”


정순의 입에서 짧게 탄식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미란은 꼬고 앉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여전히 은성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순이 손을 뻗어 탁자 위에 올려진 은성의 손목을 슬그머니 잡았다. 은성은 정순에게 손목이 잡힌 채 경직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거 무척 오래전 일인데.”

미란이 풋하고 웃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데 그런 중요한 사안을 잊어버리겠어요?”


정순이 은성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은성은 이미 손목에 가해지는 힘의 의미에 순응할 마음이 없었다.


“내가 했던 일은 시스템을 투명하고 합법적으로 바꾸는 일이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요. 그때 패거리 몰고 다니면서 나를 공개적으로 그렇게 묵사발 내놨으면 됐지 뭣 때문에 아직도 그렇게 떠들고 다닌대요? 스웨덴에 처음 왔을 때 어떤 사람이 홍마담에 대해 말하면서 **년이라고 하길래 ‘표현 참 심하다’고 했는데 내가 직접 겪어보니 그녀는 진정 미친년이더군요. 그리고 당신, 친구는 개뿔 딱 봐도 따까리구만.”


정순이 은성의 손목을 놓고 고개를 숙인 채 ‘으하’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순은 미란이 자리를 떠나기 전 홍마담에게 은성의 거친 표현을 전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했다. 그리고 은성은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본디 한 성깔이 있는 인물인데 그 점을 미란이 건드린 만큼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란다고도 했다. 카페에 둘만 맥없이 남게 되었을 때 정순은 곤란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말을 아무 감정 없이 툭툭 내뱉는 미란이나 케케묵은 옛날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는 홍마담이나 그런 쓸데없는 말에 새삼스레 파르르 떨며 혈기를 참지 못하는 은성이나 모두 재미가 결핍된 사람들로 어찌 보면 조금씩 아픈 사람들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재미와 관련된 긴 잔소리 끝에 결국 드라마 출연에 대한 은성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은성이 엄마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방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밤 동안 갇혀 있던 고요를 흩으며 엄마가 말했다.


“지금 나가는 거야?”


은성이 누워 있는 엄마에게 다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내가 시끄럽게 해서 깨셨나 봐.”


엄마가 팔을 뻗어 침대 머리맡의 조명을 켠 다음 이불을 가슴에서 조금 밀어냈다. 은성이 엄마의 등 뒤로 팔을 뻗으려 했지만 엄마는 가볍게 손사래를 친 후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 가서 촬영 잘해라. 옛날에 네 꿈이 배우 아니었니?”


은성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어린이들의 꿈이 배우나 가수 아니겠어요? 오늘 내가 찍는 건 그냥 뒷모습만 잠깐 나오는 거래. 얼굴이 훤히 다 나오면 당연히 못한다고 했지.”

”하면 하는 거지 당연히 못하기는.”


은성이 손을 들어 엄마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 몇 올을 천천히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오늘은 아침하고 점심을 엄마 혼자 드셔야 하는데….”

“밥 혼자 먹는 게 무슨 대수라고. 너는 나 노인네 취급하면서 내 옆에 붙어있을 생각 그만하고 밖으로 자꾸만 나가. 그래야 기회도 얻고 그러지.”

“무슨 기회?”


엄마가 은성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사람 일 모르는 거다. 오늘은 엑스트라지만 내일은 스타로 거듭날 수도 있는 거야.”

은성은 마흔다섯 살의 딸로서 엄마에게 어쩐지 좀 미안한 심정인 채로,

“무슨 스타 같은 말씀이야?”라고 말하며 공연히 하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은성은 집에서 출발한 지 사십 분이 지난 후에야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기차가 여러 역을 거치는 동안 창밖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종점이 가까워지면서 객실은 한산해졌다. 종점까지 마지막 한 구간은 국적을 짐작할 수 없는 한 무리의 동양인 남자들과 은성만 남아있었다. 남자들은 쉬지 않고 웃고 떠들었다. 은성이 종점인 기차역에서 내려 출구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 함께 내린 무리 중 하나가 은성에게 다가와 암호를 대듯 오늘 촬영할 드라마의 이름을 말했다. 은성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가 손을 들어 멀리 버스 정류장 팻말이 보이는 방향의 출구를 가리켰다. 한결같이 두꺼운 점퍼 차림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앞에서 걷던 남자들은 번갈아 뒤를 돌아보며 은성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주변에 건물이 없어서인지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왔고 매운 바람 때문에 은성의 턱이 가슴에 파묻힐 듯 움츠러들었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르자 정류장 팻말 근처에서 서성이던 여자 하나가 은성과 남자들을 향해 드라마 이름을 크게 외쳤고 추위에 떨며 걷던 사람들은 여자가 승합차의 문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차에 뛰어올랐다. 날씨가 매섭게 추운 데다 낯선 상황들이 불편하기만 해서 은성은 남자들 뒤에서 마지막으로 승합차에 오르며 정순에 대한 원망의 말을 낮게 뇌까렸다.


촬영 장소인 성은 스톡홀름과 주변 지역의 다른 성들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었지만 넓은 정원의 한쪽은 산책로로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골프장으로 이어져 시야에 가리는 것 없이 전망이 훤하게 트여 있었다. 성의 입구 계단에는 이미 촬영을 시작한 사람들이 정장 코트 차림으로 열을 맞춰 서 있었고 빨간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장비를 지닌 사람들과 계단에 서 있는 배우들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성까지 차를 운전해 온 여자가 쭈뼛거리고 있는 은성과 남자들에게 성 안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은성이 계단을 오를 때 꽁지머리를 한 젊은 남자 하나가 무리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아니 여기는 웬일이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갑작스러운 한국어 인사에 놀란 표정을 지었던 은성이 곧 밝게 웃으며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안녕하세요?”라고 말했다. 남자의 표정은 이른 겨울 아침의 바람과 추위에 아랑곳없이 무척 환하고 즐거워 보였다. 빨간 코트의 여자가 통성명을 하고 있는 꽁지머리의 남자와 은성을 바라보다 은성과 눈이 마주쳤을 때 무척 반가운 내색을 했다. 은성은 승합차를 함께 타고 온 무리와 함께 열려 있는 성의 현관문을 통과해 내부로 들어섰다. 성의 입구에서 문 하나를 더 지나서 들어선 거실의 바닥에는 화려한 꽃무늬의 붉은색 양탄자가 넓게 깔려 있었고 한쪽 모퉁이에 꽃잎 모양의 조각들을 정교하게 붙인 흰색 벽난로가 바닥에서 천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현관문과 방문 두 개가 모두 활짝 열려 있어 실내라고 해도 외부에서 바람이 들어와 춥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금색과 붉은색 그리고 갈색의 장식이나 가구 때문에 방 안은 어쩐지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풍겼다. 은성은 거실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규모는 작지만 여전히 왕가에 속해 있는 성답게 품위와 위엄이 느껴지는 이곳이 은성은 금방 좋아졌다. 은성은 정순이 말한 것처럼 이 성에서 한나절 머물면서 공짜 점심을 먹고 커피도 마시며 함께 노닥거릴 수 있었으면 무척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관에서 양옆으로 연결되는 방들의 문이 모두 열려 있었지만 사람들은 커피와 다과가 마련된 작고 아담한 왼쪽 방으로만 모여들었다.


은성은 다른 사람들처럼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한 잔 뽑아 들었다. 하지만 기차에서부터 내내 함께 왔던 남자들이 방 안에 놓인 몇 개의 테이블에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저희들끼리 스웨덴어로 잡담을 했으므로 은성은 두 개의 작은 방을 지나 사면의 벽이 푸른색의 실크 벽지로 둘러싸인 방으로 들어섰다. 은성이 벽에 걸린 왕가의 초상화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입구 계단을 오르면서 마주쳤던 빨간 코트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은성에게 다가왔다. 작은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자를 마주 보고 섰을 때 은성의 머릿속에 그녀가 출연했던 드라마가 갑자기 떠올랐다. 은성이 당신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었노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여자가 매우 급하고 빠른 스웨덴어로 은성에게 물었다.


“스웨덴어와 영어 중 뭐가 더 편해요?”


은성이 대답했다.


“스웨덴어요.”


여자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레나예요.”

“은성입니다.”


레나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잠깐 두리번거리다 말했다.


“당신이 오늘 맡게 된 역할은… 저기 보이는 저 남자.”


레나가 가리키는 손끝이 자신을 향하는 듯하자 남자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저 남자에게 버럭 화를 내는 거예요.”


레나가 코트 주머니에 꽂혀 있던 종이뭉치를 꺼내든 후 빠르게 몇 장 넘겨 은성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이 부분을 오늘 은성이 연기해야 하는 거죠.”


은성이 레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깨닫고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놀란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제가 연기를 해야 한다고요?”


스태프 한 명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 레나에게 급한 듯 말을 건넸고 레나는 은성의 물음에 대한 대답 없이 스태프와 함께 재빨리 방을 나섰다. 정순이 함께 오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약속한 것은 지키겠노라고 마지못한 걸음을 했던 것뿐인데 갑자기 연기를 해야 한다니. 은성은 전날 밤에 라면을 먹고 부은 얼굴로 버럭 화를 내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국영 방송을 통해 전국으로 내보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고등학교 3학년 때 대입 원서를 쓰면서 ‘연극영화과에 지원해 보면 어떨까’ 잠깐 생각한 적이 있고,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나왔던 나이 오십의 배우 지망생 오미희의 대사, “이 나이에 뭘 하겠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연기 학원에나 다녀야지.”가 지금껏 보았던 수많은 영화의 대사들 중 가장 가슴에 깊게 새겨진 대사였다 하더라도 이건 안 되는 일이었다.


은성은 레나에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나를 찾아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레나는 현관문 안쪽에서 작은 기계들을 올린 판을 띠처럼 동그랗게 허리에 두르고 윈드 스크린이 씌워져 있는 기다란 마이크를 손에 들고 있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은성은 레나와 음향 담당인 것 같은 남자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틈을 찾을 수 없자 대신 조연출인 화니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찾아도 눈에 띄지 않던 화니가 갑자기 현관 중앙에 불쑥 나타나 다른 모든 방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가진 휴대폰을 모두 꺼 주세요.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도 안 됩니다. 오늘 여기에서 사진을 찍는다? 절대 안 돼요. 드라마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기 전에 블로그나 페이스북 같은 곳에 사진 올리고 드라마 내용을 좀 쓰고… 그러면 절대 안 됩니다.”


말을 마친 화니가 전원을 끄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드는 사람들을 빠르게 지나치며 은성에게 곧바로 다가왔다.


“레나에게서 이미 얘기 들었지요? 오늘 두 명의 보조 출연자가 빠지는 바람에 완전히 패닉 상태였어요. 한 명은 배탈이 났다고 하고 또 한 명은 집합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두절 상태예요. 그중 한 사람은 대사까지 있는데 말이에요.”


은성은 한국인 엑스트라 중에 한 명은 대사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화니의 사무실에서 들었었다. 그게 누군인지 이름을 묻지는 않았지만 정순은 대사가 있는 그 사람이 부럽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 성은 이미 예약해 두었고 배우들 스케쥴도 잡아 놨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은성이 오늘 한 번은 머리를 묶고, 한 번은 머리를 풀고, 옷을 갈아입어 가면서 두 사람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한 번은 거의 뒷모습만 나오니까 문제없어요.”


화니가 말을 마치고 나서 입을 크게 벌리고 환하게 웃었기 때문에 은성은 이 일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만 지어 보였다. 화니는 은성을 남겨두고 어딘가로 휑하니 갔다가 손에 시나리오를 들고 금방 다시 나타났다. 화니가 은성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시나리오를 몇 장 넘겼다.


“음… 여기 바로 이 부분. 나쁜 놈.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이걸 그냥 한국어로 하면 되는 거예요. 쉽죠? 스웨덴어는 자막으로 나갈 거니까.”


화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조금 전에 레나가 가리켰던 남자를 다시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바나나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서 커피포트를 눌러 종이컵에 커피를 받던 남자가 은성과 화니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어야 하니까 음… 이렇게 말이에요. 나 보세요. 이렇게.”


화니가 최대한 눈을 부릅떠 보이며 눈썹을 치켜세울 때 은성이, “저기 잠깐만요.”라고 말했다. 화니가 은성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은성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오늘 은성마저 없었다면 우린 끝까지 패닉이었을 거예요. 지금 우리에게 은성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그리고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은성이 이제 두 사람 역할에 대사까지 하게 되었으니 처음 얘기했던 출연료의 두 배 이상 받게 될 거예요.”


화니의 분주한 시선은 이미 다른 방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했고 은성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화니는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레나와 화니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던 남자가 바나나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은성에게 다가왔다.


“이동환입니다. 원래 제 파트너는 지금 연락두절 상태라고 하더군요.”


은성은 동환이 말을 걸어오자 반가운 내색을 했다.


“아, 한국분이 또 계셨네요. 사실은 기차에서부터 뵀는데 사람들과 스웨덴어로 워낙 유창하게 대화하시길래 아닌 줄 알았어요.”


동환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제가 한국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한국에서 온 지는 한 십 년 됐습니다. 아내를 만나면서 왔으니까요.”


은성이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그러세요? 그럼 저보다 나중에 오신 건데 스웨덴어를 정말 잘하시네요.”


“스웨덴어를 잘하려고 집에서도 스웨덴어로만 대화했거든요. 아내는 아이가 한국어를 못하는 게 제 탓이라고 합니다.”


동환이 큰소리로 웃던 끝에 느닷없이 쓸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환의 표정이 급작스럽게 변하는 것을 의아해하며 잠시 머뭇거리다 은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오늘 제가 한국어로 화를 내야 한다는데 드라마 내용을 전혀 모르면서 시키는 대로 막 해도 되는 걸까요? 전체 시나리오를 읽지 않았으면서 말이에요.”


동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용은 나도 몰라요. 그런데 레나가… 그녀가 시나리오 쓰고 감독하면서 배우도 하는 사람인 거 아시죠? 제가 레나가 쓴 드라마 시리즈를 다 봤거든요. 다른 나라 이미지 훼손하고 그럴 사람이 결코 아니에요. 그리고….”


동환이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주위에 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은성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 드라마 말고 레나의 다음 작품에 한국 사람 한 명이 시종일관 비중 있게 나올 거라는군요.”


계단 장면을 찍기 위해 건물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달음박질하듯 추위를 피해 실내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다과가 차려진 방의 커피포트 앞에 줄을 섰고 배우와 스태프들이 뒤늦게 들어오며 줄을 이어갔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레나가 은성에게 다가와 말했다.


“커피 휴식 후에 바로 촬영에 들어갈 거예요.”


레나가 음향 담당인 남자를 향해 가고 동환이 남자 엑스트라가 모여 있는 자리로 갔을 때 계단에서 은성과 짧게 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이름이 두식이라고 밝혔던 꽁지머리의 남자가 커피잔을 들고 은성에게 다가왔다. 두식은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은성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그동안 왜 그렇게 꼼짝을 안 하고 사셨어요?”


은성은 어디에서 마주쳤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이 은둔에 가까운 그녀의 생활을 지적하는 것 같은 말을 하자 조금 불편한 기분이 되었다. 두식의 질문에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은성이 빨갛게 얼어버린 두식의 두 뺨과 코끝을 보며 물었다.


“바깥 날씨가 무척 추운데 괜찮으셨어요?”


두식이 코끝을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이까짓 추위 별거 아니에요. 한국인 조연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는데 나서서 도와줘야지 어쩌겠어요. 오늘 홍마담이 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김은성 씨도 오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


두식을 향해 애써 부드럽게 웃던 은성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오늘 불참한 두 명 중에 한 명은 정순이니 대사가 있다는 다른 한 명은 홍마담인 셈이고 그렇다면 은성이 오늘 졸지에 떠맡은 역할은 애초에 홍마담의 것이라는 얘기였다. 은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홍마담이 이 성에 오지 않았기 망정이지 혹시 이곳에 하루 종일 함께 있게 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일이었다. 은성은 홍마담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자신이 맡고 있던 일에서 스스로 내려온 이후로 홍마담이 나타날 만한 자리는 되도록 피해왔었다. 홍마담이 워낙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는 인물이다 보니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면 한국인들이 참여하는 거의 모든 활동을 피해야 했다. 은성은 오늘 홍마담의 불참은 하늘이 도운 일이라 생각했다. 음향 담당인 남자가 붐 마이크를 한쪽 벽에 세워 두고 여전히 허리둘레에 장비들을 두른 채 한 손에 마이크 송신기를 들고 은성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노아라고 소개했다.


“블라우스 안으로 무선마이크를 넣어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은성은 블라우스를 스커트 밖으로 빼낸 후 몸수색을 당하는 사람처럼 팔을 양 옆으로 벌렸다. 노아가 스커트 허리단에 마이크 송신기를 꽂고 실오라기 같은 마이크 줄을 블라우스 속으로 넣어 가슴팍까지 올린 후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그러고 나서 블라우스 밖에서 마이크가 보이는지 확인했다.


“됐습니다.”


노아가 장비를 챙기는 동안 레나가 은성에게 다가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은성과 함께 기차와 승합차를 타고 왔고 오랜 시간 테이블에 앉아서 잡담을 나누던 남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팔짱을 끼고 둘씩 셋씩 모여 서서 대화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레나는 동환에게 은성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은성은 어쩐지 사람들이 자신만 보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매우 낯익은 얼굴 하나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방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홍마담이었다. 홍마담은 벌게진 얼굴로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허리를 숙이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은성의 눈앞으로 빛이 쏟아져 내리듯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레나가 은성을 향해 말했다.


“내가 사인을 보내면 바로 대사를 하는 거예요. 화난 표정 잊지 말고.”


레나와 몇몇 스태프들이 구석으로 가더니 일제히 쪼그리고 앉아 스태프 한 명이 들고 있는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말을 주고받았다. 허리를 숙이고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내쉬던 홍마담이 허리를 일으키더니 레나와 스태프들에게 다가갔다. 은성의 눈길이 홍마담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갔다. 홍마담이 스웨덴어로 ”잠깐!”이라고 외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홍마담을 향했다. 그러나 그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곳에 있는지 보이지 않던 화니가 번개같이 나타나 홍마담을 감싸 안듯 잡고는 재빨리 방을 나갔다.


은성은 레나가 지체하지 말고 자신에게 사인을 보내주기 바랐다. 은성은 레나로부터 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계속해 왔던, 부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에 대한 걱정과 한 번 찍힌 영상은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신에게서 하얗게 증발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에 잘해보고 싶다는 느닷없는 의욕이 불꽃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은성은 홍마담이 금방이라도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너 이 촬영 취소야!’라고 외칠까 봐 불안하기까지 했다. 스태프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촬영에 필요한 사람만 남고 모두 방에서 나가 달라고 말했다. 두식이 여전히 커피잔을 손에 든 채로, “자 그럼, 건투를 빕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람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은성과 마주 보고 서 있던 동환이 씩 웃으며 말했다.


“화를 내야 한다니까, 최근에 화나게 했던 사람을 떠올리면 되겠네요.”


은성은 떠올리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방금 홍마담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은성은 홍마담을 향한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다. 레나가 손을 높이 들어 올리며 “지금!”이라고 말했다. 지금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성이 눈에 힘을 주고 동환의 얼굴을 아래위로 훑으며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뺨에도 약간의 경련이 일었고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야, 이 나쁜 놈아!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앞으로 절대로 다시는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마!”


카메라를 들여다보던 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큰 소리로 말했다.


“퍼펙트!”


레나가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동환이 뜨악한 표정으로 은성을 바라보았다.


“대사를 엄청 늘리셨네요. 그리고 이렇게 실감 나게 하실 줄이야.”


은성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너무 부끄럽네요.”


레나는 은성에게 다른 각도에서 세 번 더 찍는 동안 조금 전에 했던 것과 같은 완벽한 표정과 말투를 그대로 유지해 달라고 말했다. 레나는 은성이 한 번씩 연기를 할 때마다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번의 장면을 모두 찍고 났을 때 은성은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긴장과 흥분을 담당하는 호르몬이 자신의 몸 안에서 춤을 추며 분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전의 그녀가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 된 듯한 엉뚱한 기분도 들었다. 홍마담을 향한 묵은 분노가 이렇게 요긴하게 사용되고 폐기 처분되는 것도 묘하면서 통쾌한 일이었다. 노아가 은성에게 다가와 스커트 허리에 채웠던 마이크 송신기를 떼어내며 전에도 연기를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촬영을 위해 닫혀 있던 문이 열리자마자 홍마담이 뛰어 들어와 레나에게 다가갔다. 홍마담은 레나에게 자신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지만 레나는, “아, 그렇군요. 그것 참 유감이네요.”라고만 대꾸하고는 스태프들과 서둘러 방을 나갔다. 레나를 따라 나갔던 홍마담이 금방 다시 돌아와 은성 앞에 섰다.


“남의 것을 뺏으니 기분이 좋아요?”


은성이 여전히 얼굴이 발그스레하게 상기된 채로 홍마담을 건네다 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참 한결같네요. ”


“지금 뭐라는 거예요? 그게 자기 역할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 내가 들어왔을 때 바로 나한테 넘겼어야지.”


은성은 홍마담을 대하는 자신의 여유 있는 태도를 스스로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홍마담, 우리 지금 꼬박 십 년 만에 다시 보는 거예요. 보자마자 이럴 게 아니라 인사를 먼저 나눠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아니 정말 이 여자가!”


은성은 촬영이 있었던 방을 한 번 둘러보고 나서 여전히 ‘아니 이런, 뭐 이런’ 하며 떠들고 있는 홍마담 앞을 지나 천천히 방을 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외식업체에서 배달해 온 도시락과 과일, 음료 등을 들고 성내에 흩어졌다. 은성은 동환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맞은편 자리에 도시락과 귤 한 개를 올려놓고 가방을 두었던 푸른 실크 벽지의 방으로 건너갔다. 은성은 가방을 들고 그대로 방을 나오려다 잠시 서서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은성의 휴대폰에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앉아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보이는 정순의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은성은 짧게 답을 써 보내기로 했다.


‘나 사십 대 중반에 드디어 재능을 발견한 것 같아’


답을 쓰면서 은성은 혼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은성이 도시락을 두었던 테이블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테이블 자리에 빈틈없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동환의 옆자리에 앉아서 그릴 연어가 들어 있는 파스타를 먹고 있던 레나가 은성을 보자 오늘 잘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동환이 레나의 말을 얼른 받아, 은성이 잘했다고 생각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출연시켜 주라고 했다. 연기를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대체로 예민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이 없던 유명한 코미디언이라는 남자가 고개를 들어 슬쩍 은성을 보았고 레나는 동환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식사를 마친 레나와 노아가 빈 도시락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홍마담이 서둘러 일어나 그들을 따라갔다. 식사를 마치고 사과를 베어 먹던 코미디언이 은성에게 평소에는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가구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지금은 회사를 다니는 게 아니라서 비교적 자유롭고요.”


은성은 그녀가 일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지 꽤 오래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 내내 동환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두식이 은성의 말끝에 느닷없이 은성과 함께 살고 있는 은성의 엄마는 무척 유능한 사업가였고 지금까지도 상당한 재력가일 것이라는 말을 했다. 코미디언이 짧게 ‘아하’라고 대꾸하며 살짝 굳어버린 은성의 얼굴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코미디언이 빈 도시락통에 먹다 남은 사과와 물컵을 담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두식도 파스타가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음식이 삼 분의 일쯤 남은 도시락통을 들고 쓰레기통이 있는 거실 쪽을 향해 갔다. 은성과 둘만 자리에 남게 된 동환이 의자에 기댄 등을 길게 늘이며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은성을 건네다 보았다.


“부유한 어머니 덕분에 사는데 별 걱정은 없으시겠네요. 그럼 오늘은 심심풀이로 나오신 건가요?”

“심심풀이가 아니라…”


은성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책로에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주 보며 길게 늘어서 있었고 가로수 사이로 멀리 보이는 바다가 겨울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흐르기 위해서 나왔어요.”


동환이 탁자 위에 내려놓았던 포크를 다시 집어 들고 도시락통에 남아있던 파스타 하나를 공연히 포크 끝으로 으깨며 말했다.


“흐르기 위해서라… 그말 듣기 좋군요. 전 석 달 후면 혼자 한국으로 갑니다. 이곳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안되더라고요. 아이하고는… 매일 화상통화를 하면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덜 들 거예요. 제게는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흐르는 걸 겁니다.”


오후가 되자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동환과 두식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스톡홀름을 향해 출발했다. 은성은 성 안을 돌아다니거나 간식을 먹다가 원래 자신의 역할이었던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는 장면을 찍기 위해 화니가 준 머리끈으로 머리를 동그랗게 묶고 역시 화니가 준 스웨터를 걸친 후 정순의 대역을 하기로 한 홍마담과 나란히 앉았다. 오후 세 시 반이 되었을 뿐인데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은성은 촬영팀이 올 때까지 한참 동안 홍마담과 가까이 앉아 대기해야 했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은성과 홍마담은 웃는 얼굴을 하고서 서로를 향해 말의 창을 거침없이 던졌다. 홍마담은 은성이 자신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미란에게서 전해 들었다고 했고 은성은 꼭 들려주고 싶었는데 그렇게라도 전달이 돼서 다행이라고 했다. 홍마담은 이것을 찍기 위해 직장에 휴가도 냈는데 사고로 길이 막히고 휴대폰은 먹통이 되고 역할은 엉뚱한 데로 갔으니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라고 했고 은성은 재수 좋은 날 제대로 다시 만나볼 의사가 있는데 홍마담은 어떠냐고 물었다.


홍마담은 뒷모습 촬영이 끝나자마자 화니가 나눠준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는 휑하니 가버렸고 은성은 사인을 하고 외투를 입고 가방을 챙겨 들고도 선뜻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들 주위를 서성거렸다. 출연자들이 모두 가고 스태프들만 남아 뒷정리를 할 때 은성을 본 레나가 은성의 곁으로 다가왔다. 은성이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즐거운 경험을 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은성에게 손을 내밀며 레나가 말했다.

“나도 무척 고마워요.”

레나가 여전히 은성의 손을 잡은 채로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했다.

“음… 우리는 나중에 다시 보게 될 것 같아요.”


은성과 레나의 곁을 지나가던 화니가 은성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였다.


차창 밖으로 밤바다 위에 길게 누운 도시의 불빛이 느긋하게 일렁이며 스톡홀름역이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오랜 시간 기차에 앉아 있었지만 은성에게는 스톡홀름역까지 오는 시간이 순간인 것만 같았다. 은성의 머릿속에 촬영장에서 있었던 장면과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이 내내 어지럽게 섞이며 둥둥 떠다녔다.


그리고 그 어지러움의 중심에는 나중에 다시 보게 될 것 같다는 레나의 말이 있었다. 그것이 단지 친절한 빈말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은성은 그 말을 떠올리며 몇 번이고 미소지었다. 은성이 내릴 채비를 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이 은성의 손끝에서 요란스레 떨었다. 은성이 외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로.”


수화기 너머로 활기찬 화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성, 은성에게 들려줄 소식이 있어요. 우리는 이 결정이 너무 좋은데 이 일이 은성에게도 아주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어요.”


은성은 자리에 그대로 선 채 휴대폰을 귀에 바짝 대었다. 그리고 화니가 전해 줄 소식이 무엇인지 듣기도 전에 펄쩍 뛰어오른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써 ‘에이 설마, 설마’ 하며 손을 가슴에 살짝 얹었다. 은성은 어쩌면 자신이 정순에게 한턱을 단단히 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어쩌면…. 엄마에게 오늘 아침까지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엄마의 말처럼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말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은성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화니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