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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달의 비밀
작성일
2022.12.13

단편소설 부문 우수상


달의 비밀

박 종 진 (미국)


닥터 백은 일흔이 넘은 나이셨지만 무척 건강하셨는데 잔병 정도는 있어도 큰 병은 없으셨다. 일반적으로 그 나이가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데 닥터 백은 삼십 분 넘게 자전거를 달려 수술 시간에 늦지 않게 오시는 것을 보면 참 건강하신 편이다. 그것도 수술받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수술하러 오시니까 더욱 그렇다는 말이다.

내 치과 병원은 규모가 작아서 나 혼자 충분히 운영할 수 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잇몸 수술 때는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그때마다 닥터 백에게 연락했고, 그분은 한 번도 거절하시지 않고 꼭 와주셨다. 아무리 봐도 훌륭한 치과 의사셨는데 닥터 백은 이상하리만큼 세상과 동떨어져 살고 계셨다. 자동차가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고 생활은 전적으로 국가에서 나오는 얼마 되지 않은 은퇴연금에 의존하셨다. 가욋돈이라면 내 수술을 도와주시면서 조금씩 버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내게 자주 돈을 빌려 가곤 하셨는데 나는 돈을 꾸어드리면서도 항상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왜냐면 그 액수가 20불, 10불, 심지어는 단돈 5달러일 때도 이따금 있기 때문이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른이, 그것도 소위 의사라는 분이 그 정도 돈이 없어서 남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 나를 속상하게 했다. 물론 내가 사례비를 드리면 바로 갚기는 하셨지만 은퇴한 의사의 생활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재산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자존심뿐이었다. 남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쓰는데 닥터 백은 여전히 접었다 폈다 하는 구식 휴대전화를 사용하셨다. 혹시 노름으로 전 재산을 다 없애셨나 의심도 해봤지만, 노름할 위인도 못 되셨다. 그저 돈과 관계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수술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가끔 닥터 백을 모시고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대접했다. 그분은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잡수시면서 얻어먹은 값이라며 어린아이 동화 같은 얘기를 해주시곤 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그때는 하늘에 달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별똥별보다 더 큰 천체가 지구와 충돌했는데 깨진 조각들이 하늘로 튀어 올라 지구 주위를 맴돌다 나중에 서로 뭉쳐져 달이 되었다고 하셨다. 닥터 백은 그런 동화 같은 얘기를 상세하게 숫자를 사용해서 설명하시고 진지하게 풀어나가셔서 듣는 이를 이야기 속으로 몰입하게 하는 기술이 있으셨다. 그냥 오래전이라고 하시지 않고 반올림하지 않은 숫자를 들먹거리시는 것으로 미루어 혹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지금 달은 옛 상처를 잊고 지구 주위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고 있지만, 골초가 된 호랑이가 담배를 끊을 때쯤에 달은 지구를 영영 떠날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난데없이 나타난 달은 우리 곁을 돌다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면서 어느 날 갑자기 달이 보이지 않아도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며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하셨다.

지난 몇 년 동안 한 달에 한두 번 내 수술을 도와주시면서 비록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긴 했지만 한 번도 늦으신 적이 없었다. 가족 얘기는 실수로라도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설령 가족이 있다고 해도 그런 노인네 비위를 일일이 맞추며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분 가족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워낙 괴팍한 성격이어서 만나고 돌아서면 무엇인가 개운찮았다. 닥터 백은 상대방을 은근히 불편하게 만드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으셨다. 하지만 그분이 내게는 꼭 맞춤형 도우미 노릇을 해주셔서 나는 불편한 감정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하면서도 그분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그분은 빈틈없이 나를 도와주셨다. 무엇보다도 잇몸 수술은 확실히 나보다 한 수 위의 전문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처음으로 연락도 없이 병원에 나타나지 않으셨고 그것이 그분과의 마지막이었다. 아무리 우리 인생이 덧없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라지만 닥터 백이 한마디 말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리자 궁금하기도 했고 한편 서운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연 생각도 흐려지는지 달리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닥터 백의 일은 내 기억에서 차츰 잊히고 있었다. 달랑 전화번호에만 의존하던 우리는 전화가 되지 않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분 말씀대로 사람의 관계는 만나고 헤어짐의 반복이 맞는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다.

나도 어쩌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되었지만, 천성적으로 게을러서인지 아니면 환경에 문제가 있었는지 별로 결혼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원래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생일 때 홀로 나를 키우시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자 미국에 사시던 이모가 나를 거두셔서 나는 시카고 이모네에서 학업을 마치고 이렇게 치과 의사가 되었다. 문학소녀를 꿈꾸던 내가 의사가 된 데는 아무런 동기도 없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모는 내가 치과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시카고 이모 댁에 얹혀살면서 사춘기를 보낸 나는 매사에 자신이 없었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책과 씨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공부가 취미였던, 아니 공부밖에 할 것이 없었던 나는 어떤 꿈도 없고 계획도 없이 그럭저럭 이모에게 떠밀려 시카고 다운타운에 있는 카운티 병원에서 치과 의사로 일했다.
세상에 사명감 없이 의사가 된 사람은 나 하나뿐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환자가 늘고 내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자 나는 직업에 보람을 갖게 되었다. 의사란 직업이라기보다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역할이란 결론에 이르자 의사가 된 것이 참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사람은 형편이 나빠지거나 궁지에 몰리면 전지전능하신 분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바란다. 그러나 신이 도와주기 기다리지 말고 내가 필요한 곳에는 주저 없이 도움을 베풀어야 한다. 나 같은 의사들이 그런 일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의사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나는 그렇게 인생의 철이 들었다.

나는 개인 병원 개업을 미국의 작은 도시인 샌피드로를 택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시간 반 남쪽으로 달리면 나오는 항구 도시인데 살다 보니 퍽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카고는 겨울에 눈 치우는 것이 큰일이다. 잘못하면 허리를 다치거나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도 있다. 차츰 기력이 떨어지신 이모 부부는 나이 든 분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옮기시려고, 이곳저곳 알아보시다가 친한 친구가 사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하셔서 나도 이모네 가깝게 이사하려고 마음먹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살고 싶었는데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산타모니카나 말리부 근처는 아주 부자들이 살고 있어서 그런 동네에 산다는 것은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는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데 언젠가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자기가 사는 동네 얘기를 하며 한번 놀러 오라고 해서 찾아갔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젠 나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데보라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직장이 있는 이곳 샌피드로에 정착한 지 꽤 되었다는데 여자 혼자 살기에 너무 좋다고 했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은 데보라네 집에서 걸어서 5분도 채 안 걸린다. 태평양 바다를 보고 꿈을 꾸며 잠을 자고, 일하러 갔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서 태평양 바다를 보며 저녁 식사를 한다. 나름 괜찮은 인생이다.

우리 집 거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곳이 카브리요 해변이다. 넘어지면 코 닿을 것 같은데 집에서 약 1마일 정도 되는 거리이고 걸어서는 20분 정도 걸린다. 카브리요 갯벌은 조개 천국이다. 모래밭 아무 곳이나 골라서 한 뼘만 파면 틀림없이 조개가 나온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란 말이 있듯이 카브리요 해변의 조개잡이도 그렇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잡은 조개를 가져가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조개들이 그런 법 규정을 잘 아는지 생각보다 쉽게 잡혀 준다.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조개 몇 마리 잡아서 신나지만 결국, 모두 바다에 놓아주어야 한다. 잡힌 조개는 단단한 껍질을 꼭 닫고 마치 그 속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경제적 성취와 사회적 지위 같은 보호막 속에 자신을 숨기고 안전하고 안락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 나는 이곳 바닷가에서 인생을 배운다.

나는 매일 아침 카브리요 해변 길을 데보라와 함께 걷는다. 비행기에서 만난 인연으로 이웃이 된 데보라와 나는 걷기 친구가 되었다. 유대인인 그녀는 나보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으로 이곳 대학병원 간호사다. 나는 매일 그렇게 총 4마일을 걷고 출근한다. 혼자 했으면 오래 버티지 못했을 텐데 둘이 같이 걸어서 서로 고마워한다. 처음 그녀 집에 들러서 커피를 마시던 날이었다. 탁자 위에는 젊은 남녀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조카 부부라고 하며 조카며느리가 한국 사람인데 변호사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대해서 꽤 많이 알고 있었다. 나처럼 독신인 그녀는 루시란 이름의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루시도 우리와 함께 걷는 멤버다. 내가 처음 루시를 본 순간 시카고에 살 때 키우던 캔디 생각이 나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요사이 웬만한 미국 도시에는 어디에나 한국 사람이 산다. 오렌지 카운티나 로스앤젤레스에는 한국 사람이 많이 살지만, 샌피드로에는 한국 사람이 없다. 그런 어느 날 처음으로 한국 손님이 생겼는데 데보라의 조카며느리 크리스털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를 하는 그녀는 나처럼 한국 사람이고 시카고 출신이어서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게다가 일찍 친부모를 여읜 것까지 같아서 우리는 언니와 동생처럼 지냈다. 그녀의 부모님은 여전히 시카고에 사신다고 하는데 물론 크리스털을 두 살 때 입양하신 미국인 양부모시다. 결혼한 후 그녀는 친부모를 찾으려고 했던 적이 있었지만, 성과가 없었다고 하면서 자기를 버린 친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세월이 흘러 상황이 변하면 이제는 서로 용서하고 보듬어 줘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데 그럴 때는 언니 동생이 뒤바뀐 것 같다. 나도 친아버지란 사람을 찾아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봤다. 한 번도 없었다. 원망도 했고 용서한 적은 있어도 찾아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유전자의 유사성 때문에 가족 관계가 성립한다면 아담과 이브의 후손인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 아닌가. 그렇다면 구태여 생물학적 혈육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새아버지는 내가 친자식이 아닌데도 애지중지 키우셨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몸이 아프다고 같이 살던 개를 남에게 맡겼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전력이 있는 내가 데보라네 집에서 루시를 보자 의식 저편에 자리하고 있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삐죽이 들고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시카고 카운티 병원에서 일할 때 많이 아픈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느라 캔디를 돌볼 형편이 안 되는 데다 이모가 개 알레르기가 있어서 할 수 없이 직장 동료에게 맡겼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뉴욕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캔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서 당시 나 스스로 몸을 추스를 형편이 못 돼 할 수 없이 데려가도 좋다고 했다. 물론 처음에는 곧 찾아와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나는 캔디를 포기하고 말았다. 친구는 가끔 캔디를 찍은 동영상을 보내주었고 그런 때마다 다시 돌려 달라고 할까 여러 번 망설이다 새 주인을 만나 잘살고 있는 것 같아서 애써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접었다. 식구란 필요할 때는 곁에 끼고 살다가, 사정이 생기면 버렸다가,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찾아오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후였기 때문이다.

토요일은 데보라가 지키는 안식일이어서 나 혼자 걸어야 했는데 나는 그녀와 매일 걷는 바닷가 길 대신 집에서 15분 떨어진 공원까지 걸었다. 거기에는 한국 정부에서 미국에 기증했다는 ‘우정의 종’이 걸려 있는데 데보라와 나와의 우정을 미리 안 것 같다. 에밀레종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커다란 종을 볼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기도하듯 캔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속죄의 날을 맞는 나는 내가 버린 가족에게 용서를 빌었고 나를 버린 가족을 용서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딱 한 가지 어렴풋하게나마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어렸을 적에 나는 아버지 수염을 만지며 잤다는 것뿐이다. 그조차 오래돼서 바랜 내 기억 조각인지, 아니면 이모가 그런 얘기를 자주 하셔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사실 어머니가 재혼하신 나의 새아버지였다.
나의 친아버지는 따로 있다. 그 사람은 4대 독자 외아들이었다는데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내 어머니는 집안의 요구와 달리 딸을 낳자 내가 채 백일이 되기도 전에 시집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며느리 될 여자가 눈에 차지 않았던 시부모는 결혼 조건을 달았는데, 아들을 낳으면 그때 정식으로 호적에 올려줘도, 만약 딸을 낳으면 보따리를 싸야 했다. 가축 품종 개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동물조차 당연히 암컷이 더 가치가 있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그 반대였던가 보다. 사내아이를 낳지 못하면 가족이 될 수 없었던 그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구습에 젖은 부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기의 처자식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애 딸린 이혼녀이기도 하고 한편 혼인신고조차 안 돼서 미혼모이기도 한 내 어머니는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턱수염의 새 아버지를 만나셨지만, 살만해지자 남편이 암으로 죽고 청상과부가 되어 혼자 나를 키우시다가 내가 중학생일 때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죄라도 지셨는지 불쌍한 내 어머니는 이혼녀, 미혼모, 청상과부 등 온갖 서러운 여자 모습으로 살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의 내 인생은 영화 한 편을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비극적이고 암울했다.
남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내게는 두 사람이나 되었지만 정작 내가 그들이 필요할 때는 내 곁에 없었다. 그러다 나이 들어 부모님 연세쯤 되는 닥터 백을 보자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웬만했으면 아버지 대접을 해드리고 싶었는데 아무리 잘 봐 드리려고 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아버지란 존재가 저렇다면 차라리 없는 편이 속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 날 닥터 백이 수술 시작보다 반 시간 일찍 병원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의 손에는 검은색 비닐봉지가 들려있었고 내 시선이 그 봉지로 간 것을 알고 말씀하셨다.
“이거 트윙키인데 닥터 정 주려고 가져왔어. 맛있어서 나는 하루 한 끼는 트윙키로 해결해. 속에는 하얀 크림이 들었지만 겉은 노란색 빵이어서 닥터 정처럼 외모는 동양인이지만 서양 사람처럼 사는 사람을 트윙키라고 한 대.”
내게 주시려고 가져오셨다면서 서양인 흉내 내는 동양인, 그것도 나를 꼭 집어 서슴없이 도매금으로 넘기는 닥터 백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안 됐다. 같은 한국 사람끼리니까 괜찮지만, 트윙키 얘기를 백인이 동양인을 상대로 했다면 인종 비하로 고소당할 수도 있다.
크리스털은 한 번도 자기가 한국인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데 나이가 들면서 정체성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어떤 미국 사람은 자기가 영어를 완벽하게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어디서 배웠는지 물었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닥터 백이 얘기하신 트윙키 생각이 나서 그녀도 나처럼 결국 트윙키로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다. 크리스털의 집 벽에는 고갱이 타히티섬에서 그렸다는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그녀의 집에 놀러 가서 그 그림을 볼 때마다 트윙키인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지만, 내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재주로 내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겠는가?

평생 아버지란 존재와 관계없이 살았던 내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닥터 백이였다. 이왕이면 멋있는 아버지상을 풍기는 그런 인격을 바랐는데 내 기대가 너무 컸던지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 같으면서도 껄끄러웠다. 그런 닥터 백이 한마디 없이 내 앞에서 사라진 후 나는 그분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전화 한 통에 연결된 우리 사이는 자주 미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당사자가 사라지고 나니 그런 부정적인 감정보다 좋았던 추억이 생각났다.
그분은 자기의 120살 생일잔치에 꼭 참석해 달라는 농담을 하시곤 했다. 왜 구태여 120살까지 사시려느냐고 여쭸더니 자기가 그 나이가 돼야 인류가 화성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 올 것 같다고 하시면서 화성으로의 이주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미래라고 하셨다.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면 그분은 치과 의사가 아니라 몽상가다. 그러고 보면 가끔 동화처럼 들려주시던 얘기가 어쩌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치과 의사이면서 왜 그렇게 변변찮은 인생을 사셨을까 생각해 본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분명 있겠지만 그것은 그분의 개인사이니 알 필요도, 알 권리도 없어서 생각을 관둔다. 십 년쯤 전에 학회 일로 한국에 간 적이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로비에 메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는 치과 의사 한 분이 나를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서 호텔 커피숍에서 그분을 만났다.
자기 대학 동기가 미국에서 치과 의사를 하다 은퇴했는데 마침 우리 병원이 있는 샌피드로에 산다며 손이 필요하면 그 친구에게 부탁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이 드신 점잖은 분의 부탁이어서 연락처를 적은 종이를 정중히 지갑에 넣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미국에 돌아와서 그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갑자기 잇몸 수술 계획이 잡히면서 손이 모자랐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어 만난 사람이 바로 닥터 백이었다.

첫인상이 나쁜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호감을 끄는 얼굴도 아니고 어쨌든 쉽게 사귀기 힘든 사람이었다. 게다가 고집이 세고, 겸손한 것 같으면서도 거만한 태도와 말씨는 상대방을 편하게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스테파니 정입니다. 이곳 샌피드로에 개인 치과 병원을 하고 있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초면의 닥터 백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내 성은 백이요. 나도 소싯적에 치과 의사를 했소.”
조금 불쾌한 생각이 들 무렵 노인의 눈에 눈물이 보이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한국에서 뵌 닥터 남궁계길께서 선생님의 연락처를 주셨어요. 손이 모자랄 때 연락드려도 되는지요?”
닥터 백은 눈물을 들켜서 신경이 쓰였는지 자꾸 자세를 고쳐 앉으시며 뭔가 불편해했고 나는 면접관이나 된 것처럼 물었다.
“샌피드로에는 한국 사람이 살지 않는데 닥터 백께서 이 도시에 사신다고 해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연고가 있으신지요?”
닥터 백은 여전히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나는 원래 로스앤젤레스에 살았지요. 은퇴할 무렵 노인 아파트를 신청했는데 지원자가 밀렸는지 쉽게 내 차례가 오지 않았는데 어떤 분 말씀이 조금 떨어진 이곳이 바다도 가깝고 노인 아파트 배정도 바로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여기서 살게 되었소.”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어서 한국에서 만난 닥터 남궁계길 얘기를 꺼냈더니 닥터 백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으셨다.
“그 친구하고는 의대 동기요. 학생 때는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아주 가끔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 전화 정도 합니다. 마침 이곳에서 치과 병원을 하시는 한국인 닥터가 치의학회 회의차 한국에 가신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내가 가깝게 살고 있으니 필요하실 때 파트타임 거리를 주시면 용돈이라도 벌어보려고 그 친구에게 연락해서 닥터 정께 다리 좀 놓아달라고 부탁했지요.”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때부터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씩 머리를 맞대고 수술을 했다. 무엇보다도 닥터 백은 잇몸 수술에 있어서 우리 젊은 의사들보다 한 수 위였다. 만나는 횟수가 늘면서 닥터 백은 내게 하던 존대를 잊어버리셨는지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하대하셨다. 아버지뻘이어서 그분이 내게 말을 놓는 것이 거슬리지 않았다. 나는 닥터 백이 시키시는 대로 일해서 누가 도우미였는지 분간이 안 될 때도 많았다.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수술이 끝나면 지친 나에게 쉬어도 좋다고 하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은 내가 조수 역할을 하는 닥터 백에게 해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그분의 허락이 떨어지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소파에 깊숙이 앉아 눈을 감고 커피를 마시면서 아무래도 주객이 바뀐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또 5불만 꿔달라고 하셨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가 처음으로 싫은 소리를 했다.
“닥터 백은 명색이 의사셨는데 아무리 은퇴하셨다고 해도 수중에 단돈 5달러가 없나요? 돈을 빌려드리기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자주 그런 부탁을 하시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성가시기도 하고 계산하기도 복잡해져요. 그냥 한 번에 돈을 넉넉히 빌리시면 어때요? 그런데 저 말고 돈을 융통할 만한 사람은 또 없나요?”
전화 저쪽에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변명하려고 마땅한 말을 찾고 있는데 닥터 백의 심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유통기한이 넘은 나이가 되었는데 그런 나를 잘 대접해 주는 닥터 스테파니 정에게 항상 감사하고 또 미안하게 생각해. 그런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신세를 갚고 싶은데 생각처럼 잘 안 되네. 나이 들어 정신이 없어지니 자꾸 해야 할 일을 까먹어. 그래서 내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만들었지. 예를 들어, 다음 날 가지고 가야 할 물건이 있으면 바로 신발 속에 넣어 둬. 그래야 안 잊어버리거든. 아무리 급해도 신발은 신고 갈 것이고, 신을 신다 보면 자동으로 그 물건을 챙기게 되니까. 물건이야 그렇다 치지만 닥터 정한테 갚고 싶은 내 마음은 신발 속에 넣어둘 수 없으니 차라리 푼돈을 빌리고 그 돈을 갚을 때마다 잊지 않으려고 내 딴에는 머리를 쓴 것인데 불편했다니 미안해. 만약 다음 생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때는 꼭 내가 베푸는 쪽이 될게.”
전화는 그렇게 끊겼고 나는 횡설수설하는 닥터 백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최근에 추리소설을 읽으셨든지 아니면 치매가 시작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더니 몇 푼 되지 않은 돈 빌려드리기 귀찮아서 한 말씀 드렸다가 다음 생이라는 황당한 말까지 들었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닥터 백을 절대로 다시 만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지난번에 얻어먹은 트윙키도 혹시 신발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비위가 상했다.

닥터 백과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무례하고, 그러나 똑소리 나게 일을 잘하시고, 마치 그리스 신화나 전래동화처럼 얘기해주시면서도 정확한 숫자와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그분의 참모습인지 헷갈렸다. 어쨌든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는 일만 골라서 하셨다.
일반적으로 신체적 불편은 바깥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본인이 잘 알고 있지만, 정신적인 이상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닥터 백은 본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다. 그런 닥터 백이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라지신 지 벌써 두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분 생각이 나면 혼자 답답하기도 했다가 그 후 소식이 궁금하기도 했다. 결론은 그분이 쳐 놓은 그물에 아직 내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닥터 백에게는 치과 일 말고 잘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꽃 가꾸기에 남다른 재주가 있으셨다. 처음에는 병원에 오실 때마다 현관 옆 화단 빈자리를 꽃으로 채워주셨는데 환자들이 꽃밭이 너무 보기 좋다고 했다. 나중에 내 부탁으로 우리 집 앞마당에는 아보카도 나무를, 그리고 뒤뜰에는 레몬과 라임 나무를 한 그루씩 심어 주셨는데 키가 내 무릎밖에 안 되는 아직 어린나무였는데도 주먹만 한 열매가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하도 신통해서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꼬마가 제 몸의 반쯤 되는 큰아기를 둘러업은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해서 한참 웃은 적이 있다. 잘 익은 레몬 하나를 따서 직접 레모네이드를 만들어 마시던 맛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현관 앞에 장미가 몇 그루 있었지만, 벌레가 극성을 부려 꽃잎을 갉아먹고 꽃봉오리까지 피해를 줘서 닥터 백은 장미를 없애고 관리가 쉬운 블루 아가베를 심어 주셨다. 우리 집에는 정원 때문에 몇 번 오시라고 했더니 나중에는 내 허락도 없이 무시로 드나드셨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아셨는지 없애려고 했던 허니서클을 잘라버리시고 대신 하카란다를 심으셨다. 우리 병원 건물 주차장에는 키가 큰 하카란다가 마치 병풍처럼 나란히 서 있는데 보라색 꽃이 만발했다가 질 때 땅바닥이 온통 보랏빛으로 변했다. 그 광경을 본 내가 탄성을 지른 적이 있었는데 잊지 않으시고 하카란다를 집 뒤편 한쪽 구석에 심어주신 것이다. 한번은 내가 꽃 중에서 수국을 제일 좋아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 후 옅은 쪽빛의 속이 꽉 찬 수국꽃이 집에 돌아오는 나를 맞았다. 가슴이 뭉클해진 나는 속으로 닥터 백에게 감사했다. 그렇게 집 앞은 깨끗이 정리되었지만, 뒤뜰 아래쪽 잔디가 물이 모자라서 누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인근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아서 잔디 관리가 쉽지 않았는데 닥터 백은 지저분한 잔디를 걷어버리고 그 대신 색색의 조약돌을 깔아주셔서 마치 유치원 놀이터 같아서 너무 보기 좋았다.

나는 발표력도 없고 직책도 없는데 학회 일이 있으면 종종 뽑힌다. 만만해서 그런가 보다. 이번에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참석자 명단에 남궁계길이란 이름이 보였다. 그분이다. 흔하지 않은 그 이름은 분명 오래전 나와 닥터 백을 연결해 주셨던 남궁계길 닥터다. 난리 통에 헤어진 친정아버지 소식을 듣게 된 것처럼 기뻤다. 첫날 일정이 끝날 무렵 그리 어렵지 않게 닥터 남궁을 만나서 호텔 커피숍에 모시고 갔다.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분은 지팡이를 의자에 기대 세우시며 나를 반기셨다.
“저를 바로 알아보시던데 우리 참 오랜만이지요?"
나도 그분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보며 인사했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세월이 꽤 지났지만 그래도 나는 바로 그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앞에 앉은 노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닥터 정께서 가끔 수술을 도와달라고 불러서 같이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어요. 그렇게 친구를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내가 닥터 백이 말없이 사라진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노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와는 치대 동기였어요. 성격이 모난 데가 있어도 좋은 사람이었지. 얼마 전에 그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생무상을 느꼈습니다. 객지에서 가족도 없이 떠나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니 짠한 생각이 듭디다. 하긴 죽은 사람이 뭘 알겠어? 그 친구는 평생 혼자 살았는데 언젠가 전화해서 자기가 버린 딸 소식을 알게 됐다며 울먹인 적이 있었어요. 할 수만 있다면 딸 곁을 맴돌며 참회하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 했는데, 그 친구 원대로 죽기 전에 딸의 얼굴이라도 한번 봤는지 몰라. 그 일로 한국에 다녀갔으면 나한테 연락을 했을 텐데. 자기 인생이 안 풀리는 것은 어린 딸을 버린 죗값이라고 하면서 마음 아파했지요. 어쩌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바닥으로 내몰고 학대하는 것이 딸을 버린 죄의 대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참, 장례식엔 가셨소?”

나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갑자기 시야가 좁아지면서 가슴이 답답해지자 상대방에게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공기였다. 호텔 현관을 도망치듯 뛰쳐나와 주차장 쪽으로 향하며 심호흡을 했다. 어지러워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이리저리 둘러보니 방파제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제주 바다 수평선 위에도 샌피드로에서 본 똑같은 태양이 지고 있었다. 불덩어리 같은 새빨간 태양이 바닷물 속으로 조금씩 가라앉는 동안 그 근처가 마치 불나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고 이내 별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냈다. 나는 일몰에 서서 불쌍한 내 어머니와 두 사람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닥터 백이 사라지기 반년 전 어느 날 해 질 녘이었다. 해거름에 정신이 팔린 나를 툭 치시며 시비를 거셨다.
“뭘 그렇게 넋 나간 사람처럼 보고 있어? 저 불타는 노을은 고작 빛의 산란 현상일 뿐이야.”
나도 지지 않으려고 맞섰다.
“닥터 백은 왜 그렇게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세요? 그저 보이는 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닥터 백은 뜻밖의 저항에 멈칫하시더니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빛에 속고 있는 거야. 그뿐만 아니라 달도 자신의 절반을 감춘 채 늘 한 면만 보여주거든. 그래서 달 뒤편에 뭐가 있는지 그런 달의 비밀은 아무도 모르지.”
마치 자기 혼자 삼라만상의 온갖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척하시는 닥터 백에게 나도 지지 않으려고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달과 우리 삶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달이 자기 뒤쪽에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겨 두었나요?”
잠깐 침묵이 흘렀고 전열을 가다듬은 닥터 백이 엄청난 결론을 내리셨다.
“왜 아직 떡방아 찧는 토끼를 본 사람이 없는지 알아? 옥토끼는 계수나무가 울창한 달 뒤편에 살고 있거든.”
상황은 그렇게 맥없이 끝났다. 잎이 다 떨어져 버린 하카란다가 늘어선 길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하시는 닥터 백의 머리 위에 달이 환하게 떠 있었고 이층 병원 창문에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불현듯 슬픈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해가 완전히 지자 별이 총총한 제주 하늘 아래서 나는 아까 호텔 커피숍에서 들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씹으면서 이리저리 앞뒤를 맞춰봤지만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펴도 내용이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이미 정상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간신히 이야기의 가닥을 잡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달이었다. 그러나 밤하늘 어디를 뒤져도 달은 없었다. 까닭 없는 상실감이 해일처럼 밀려오는데 거친 파도 소리, 바람 소리 틈에서 닥터 백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호랑이가 담배를 끊자 달은 이별의 때가 온 줄 알고 서둘러서 지구를 떠났을지 몰라.”

호텔 방에 도착하자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면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환하게 웃으시며 마치 달덩이처럼 탐스러운 수국 한 송이를 내 품에 안겨 주셨다. 그 얼굴이 왠지 친숙하게 느껴졌고 낯이 익었다. 나는 꿈속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뜨거운 눈물이 되어 내 볼을 타고 흐르며 그 얼굴이 누구인지 생각날 때쯤 나는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호텔 창문 밖에 펼쳐진 밤바다 위에는 그제야 휘영청 밝은 달이 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