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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글짓기 중・고등 부문] 다름을 낭독하다
작성일
2024.01.24

청소년 글짓기 중・고등 부문 최우수상


다름을 낭독하다

주희(독일)


나는 독일의 중,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다.
9학년, 한국에서는 중학교 3학년. 2021년 1학기 말에 독일어 수업에서 받은 과제는 “Poetr y Slam”이었다. 이는 역동적이고 유연한 톤으로 시를 낭독하는 일이었다. 주제는 자유, 팀으로 활동해도 좋았다.
선생님이 덧붙이시길, Poetr y Slam은 연설에도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사회 문제 혹은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주제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우리 반의 학생들은 대부분 똑똑하고 사회에 관해 열정적이었다. 함께할 친구를 찾는 무리들에 의해 교실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문득 나는 당시 얼마 되지 않았을 적, 울면서 하교했던 내 동생의 얼굴을 회상했다. 어릴 적 내가 장난으로 의도치 않게 울렸던 그 얼굴보다 훨씬 더 서러운 표정이었다. 헐떡 거리며 그 자리에서 말하길, 반 아이에게 모욕을 당했단다.


“수학 문제 답을 말하고 있었는데, 그 애가 나보고 개고기 먹는 야만인이라고 빈정댔어.”


개고기. 나는 내 발치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 강아지를 쳐다보았다. 또야, 라는 체념 어린 반응과 울컥하는 감정이 공존했다. 편견 하나가 지성인과 야만인을 나누는 법이다. 독일에서 개는 인간의 동반자다. 동반자를 잡아먹는 야만인이라 불린 내 동생은 돌잔치를 끝낸 후부터 쭉 독일에서 살아왔다.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 오던 어떤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희야, 넌 누구랑 할 거니? 저 혼자요.집으로 돌아와서 잠깐 자괴감에 빠졌다. 안 그래도 어려운 독일어로, 수행평가를 혼자서 한다니.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떠올린 주제는 공감은 커녕 어린 청소년의 예민한 공격성으로 간주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다른 주제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이걸 하고 싶다, 해야만 한다는 강렬한 감정이 뱃속에서 간질거렸다.


얼마 후, 가라앉지 않은 코로나의 여파로 인한 뉴스를 보았다. “동양인 차별 만연”. 자리가 남아도는 유럽 레스토랑에서, 동양인들만 바이러스 취급을 당하며 쫓겨났다 했던가. 나는 하굣길에 낯선 사람에게 코로나라고 불리며 비웃음을 당했다던 내 친구를 떠올렸다. 다른 형태이지만 그 익숙한 울렁거림을, 나는 몇 번이고 겪어 보았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 칭챙총! 그렇게 말한 사람들은 그것이 재밌는 농담이라도 되는 듯이 웃었지만 나는 그 농담을 들을 때마다 울고 싶었다. 우리 가족이 독일로 온 지가 어느덧 11년이었다. 나는 사회성을 형성할 시기부터 쭉 이곳에서 살아왔는데, 대체 어디가 내 나라라는 것인가.


조심스레 그 말을 처음 꺼낸 것은 내 독일어 과외 선생님 앞이었다. 성적을 생각하면 이런 주제보다는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환경오염이나 전쟁을 꺼내야지 수지가 맞았다. 그러나 내 감정을 진솔하게 말한 끝에 돌아온 그분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것이 시 낭독에서 가장 중요한 거야. 네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것에 감정을 실어 말하는 것.”


슬램 발표까지는 남은 2주간 나는 과외 선생님과 단어를 고르고, 내 경험을 넣고, 알고 있는 은유를 죄다 끌어모았다. 쓰라리다기보단 씁쓸한 차별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나 자신조차도 깜짝 놀랄만큼 수많은 감정들을 발견했다.


나는 불합리 속에서 계속 살아왔기에, 내가 매 순간 무서워하고 아파하고 분노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단 것이었다.어쩌면 나도 누군가를 편견에 가두는 불합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 하는 회한도 들었다. 이런 감정을 내 시로 하여금 일으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친구들이 들어는 줄까요. 패기 좋게 시작했으면서, 시를 쓰는 동안은 불안한 즐거움이 반, 두려움이 반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불안을 과외 선생님께 털어놓았다. 이걸 애들이 듣고 비웃지는 않을까요, 선생님? 전 무서워요. 11년 동안 한 마디 않고 살아왔는걸요.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예민한 아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희야, 선생님은 너보다 오래 살아왔는데 말이지, 네가 이 주제를 꺼내고서야 이런 씁쓸한 일이 내 주변에 일어남을 처음 알았단다. 나는 네게 감사하단다. 네 친구들도 꼭 그럴 거야. 너 같은 친구가 있기에, 그 아이들은 그 불합리를 나보다도 일찍 깨닫지 않겠니? 그게 미래를 만들어 가는 첫 걸음이란다.”


얼마 후 나는 시를 완성했다.
발표 당일날 주어진 20분 남짓의 연습 시간 내내 긴장감에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복도를 서성이며 시를 중얼거렸다. 고작해야 최종 성적의 반의 반도 들어가지 않을 발표 하나가 내 속을 죄다 흔들어 놓았다.


슬램을 들은 친구들의 반응이 예상이 가지 않았다. 우리 앞에서 그런 불만만 생각하고 있었다니 최악이야 - 따위의 말을 듣지 않을까? 외국인인 나를 ‘신기해’ 하고 ‘배려’ 하려는 친구들을 꾸짖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런 일이 너희 주변에, 심지어는 그 가해자가 너희가 될 수도 있음을 알려 주고 싶을 뿐이었다. 학교는 배움터니까. 사회에 나가기 전 존중과 이해, 평등과 불합리를 가르쳐 주는 곳이니까.


연습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니, 반 아이들이 앞으로 나와 발표하기 시작했다. 내 반 아이들은 대체로 똑똑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들의 사회 비판과 공감대 사이에서, 나는 홀로 생소할 화제이자 화재(火災)를 일으킬 수도 있을 폭탄을 쥐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게 좋지 않을까? 마치 홀로 인간 사이에 낀 외계인이 된 것 같았다. 그 감정은 독일에서 한인으로 사는 동안 지겹도록 느낀 감정이었다.


편견으로 사람은 위치가 나뉜다. 검은 머리에 찢긴 눈, 누런 피부와 커다란 광대의 흥미로운 생김새를 가진, 신비롭고 아름답고, 순종적인 동양인. 동양인은 다들 순하고 착하니까, 라는 편견은 내 발언권을 항상 앗아갔다. 내가 경험한 모든 차별은 투명망토를 뒤집어 쓰고 인지조차 없이 나를 공격해 오곤 했다. 그에 반응하면? 나는 농담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울분을 토하는 대신 한 번 쓰게 웃고 그 자리를 도망치듯 뜨곤 했다. 이번만큼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나는 손을 들었다. 네가 할 거니? 네, 제가 할게요. 나는 내 시가 적힌 종이를 책상 위에 두고 왔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데 굳이 대본이 필요하진 않았다.


모두가 날 보고 있었다. 무감한 눈빛이었다. 나의 발표의 끝에는 항상 그들의 평가가 있었다. “잘했어. 외국인치곤.” 이번 발표에서만큼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냉정하게, 평등한 학생으로서 내 문법이나 작은 맞춤법 등의 실수들을 지적받고 싶었다.


나는 한숨을 들이쉬었다. 관자놀이에 붙은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아예 박동하는 것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순간부터 갑자기 심장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나를 보면 그들은 장난처럼 눈을 뱀처럼 길게 쭉 찢었다.
내 국적에 상관하지 않고 날아오는 짙은 파열음의 칭챙총도, 우스꽝스러운 합장도 기억났다. 문법을 틀리기에 기회를 주지 않던 선생님도, 나는 ‘독일인이 아니기에’ ‘배려’해주던 친구들도 생각났다. 그렇게 내게 모멸감을 주던 이들은 대개 그것이 모욕이라고 생각치 못했다. 그들의 앞에서는 항상 동물원 침팬지가 된 기분이었다. 내 가치는 모조리 덮여버린 채 ‘이방인’이라는 칭호 하나만 붙는 것 같았다. 상대적 약자 였던 내게는 항상 체념이 요했다. 내가 ‘다르기에’ 벌어지는 ‘당연한’ 불합리였다. 사실 인간은 모두 다양함이 당연한데. 이상하지 않은가? 21세기는 평등의 시대다. 모두가 제 문화와 생김새를 편견없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나를 포함한 내 다문화 가정의 지인들이 경험한 불합리들은 그 정신에 지극히 어긋난다. 차별과 불합리가 어찌하여 당연시 되어야 만 하는가? 심지어 내가 사는 곳이,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
범국으로서의 불명예를 부끄러이 여기는 독일인데도.그들이 원하는 신비로운 오리엔탈 소스같은 시큼한 관상에 일부러 나 자신을 끼워 맞춰 보려 했었던 내가 있었다. 그들의 얄팍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나에게 실망할까봐 더럭 겁만 주워먹었었다. 동양인은 수학을 잘한다기에 수학을 잘하는 척해야 했고, 한자를 들이밀기에 잘 알지도 못하는 한자를 끙끙 외워야 했다. 내 부모님의 어눌한 발음을 따라하며 깔깔대던 친구들에게 맞춰 웃어주어야 했다. 잔인한 것은 그들의 얼굴에는 대놓고 드러내는 악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지겨워 쉬는 시간이면 학교 화장실에 숨어 문을 잠그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재외국민으로서의 삶을 원망한 적이 많았다. 사실 부모님도 그러셨을까.


다름을 꺼리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라지만, 사람이 짐승과 비교되는 것은 그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생각한다. 나를 차별과 편견 속에 몰아넣던 그들에게 나는 항상 가르쳐 주고 싶었다. 나 역시 너희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고. 근본 없는 편견에 갇혀 버려 그것을 모르는 너희를 연민한다고.


이 낭독을 듣고 있는, 졸업 후 헤어질 고작 30명 남짓의 전부가 나와 나의 시를 영원히 기억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기억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이라도 있다면,나는 그만큼 세상을 바꿨단 뜻이겠지. 그게 첫걸음이야. 그 한 명이 모여 모여 우리가 되는 거야. 우리가 바꿀 수 있어. 당연하지 않게 만들 수 있어. 오랜 시간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시원하게 빠져나갔다. 모두가 조용했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이윽고 울리는 수업종과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았다. 친구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한 친구는 심지어 울고 있었다. 나도 그럴 뻔했다. 차별의 서러움에 울던 나를 그제서야 안아 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아주 자그마한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인지했다.
커다랗게 쓰인 최고점과 함께, 내게 남은 것은 내 낭독을 들은 반 학생의 평가였다.


“내 주변에 그런 억울함을 겪는 사람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나는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게 누군가한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네 덕분에 알았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깨닫게 해 줘서 고마워.”


그날 나는 진정으로 내가 독일에서 사는 한인임에 감사 했다. 누가 그런 경험을 쉬이 해 보겠는가? 아무도 모를 불합리를 알고, 그것을 고치는 첫걸음을 떼는 경험 말이다. 그건 정말로 뿌듯하고 눈물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