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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그땐 힘들었었지
작성일
2024.01.25

체험수기 우수상


그땐 힘들었었지

배정희(태국)


2016년 2월, 우리 가족은 삶의 터전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옮겼다.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던 나는 입시 경쟁에서 발버둥치는 학생들을 보았다. 입시의 굴레로 내 자녀들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 주고자 중국 곤명으로 이사했고, 아이들은 홈스쿨 교육과정으로 운영하는 작은 학교에 입학했다. 첫째 아이는 한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새롭고 신기한 학교로 전학을 갔다. 중국에서 아이들이 한국과 다른 교육을 받고 성공한다는 확신은 없었다. 우리가 중국으로 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곳에서 만난 밝은 표정의 한국 학생들 때문이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6개월 전, 여름방학을 맞아 곤명을 방문했었다. 그곳에서 생기 넘치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학생들끼리 새 학기를 준비하며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모습에서 한국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우리 아이들이 이처럼 생기 있는 중고생으로 자라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의 삶을 내려놓고 중국으로 옮기기로 했다. 다행히 부부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기에 빠르게 결정하고 바로 떠날 수 있었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새로운 중국 환경에 적응하며 분주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처음 머문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였다. 그곳에서 2월의 추위와 싸워야 했다. 곤명은 집을 지을 때, 난방을 설치할 수 없도록 법이 제정되어 있다. 그래서 가끔 햇볕이 있는 바깥보다 온종일 그늘인 집 안의 기온이 더 낮을 때가 있다. 여름에는 좋지만, 겨울에는 추위로 힘들 때가 있다. 보일러가 없어 한 개의 전기장판에서 네 가족이 똘똘 뭉쳐 잠을 청해야 했다. 난방이 없는 집이라 집안 공기가 차가워 잠을 잘 때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야 했다. 나중에는 침대 위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보일러가 없으니 태양열로 수돗물을 데워 온수로 사용한다. 우리가 도착하고 며칠간 흐린 날씨로 인해 온수도 나오지 않았다. 찬물로 씻거나 가스레인지에 물을 데워서 씻었다. 여러가지 힘들고, 불평할 만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겪을 수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불편했지만, 우리가 선택한 길이기에 마음은 편안해서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중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현지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다. 곤명은 중국의 남서쪽 끝부분에 위치하여 토속적인 음식이 강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은 중국 음식에 거부감 없었다. 아이들은 길거리 음식을 좋아해서 용돈만 생기면 이것저것 새로운 음식들을 사 먹으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새롭게 접한 음식들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도 중국에서 처음 먹었던 쌀국수와 만두에 대한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중국인과 중국 식당은 있다고 한다. 지금 지내고 있는 태국에서도 우리 가족은 중국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가곤 한다.

우리는 자가용이 없어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곤명은 날씨가 좋은 편이라 걸어 다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가까운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 각자 배낭을 하나씩 메고 출발한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집까지 들고 와야 하기 때문이다. 20분 이상 걸어야 하기에 배낭에 물건들을 담는 게 수월했다. 마트에 다녀오다가 도중에 그늘에 앉아 쉬면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는 일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중
국에서 지내는 동안 집에 있는 냉장고는 용량이 매우 적어서 한 번에 많은 음식 재료를 쌓아 둘 수 없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사서 요리해 먹고 최대한 남는 재료가 없도록 했다. 그래서 매일 시장에 가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

아이들은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해 갔다. 미국 홈스쿨 교재를 사용하는 학교이기에 모든 것을 영어로 공부해야 했다.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첫째는 겨우 알파벳과 간단한 영어 단어만 아는 수준이었고, 둘째는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였다.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 둘째는 유치원 과정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강의식 수업이 아닌 온전한 자기주도학습으로 이루어진 교육과정이었다. 두 아이는 공부하는 기질이 완전히 달랐는데, 각자의 스타일에 맞게 잘 적응했다. 첫째는 책상에 묵묵히 앉아서 공부하는 스타일이고, 둘째는 친구들
과 시끄럽게 떠들며 공부하는 스타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어 실력이 느는 아이들이 신기하게 보였다.

중국에 도착한 지 3개월이 지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게스트하우스는 임시로 지내는 곳이라 한국에서 택배로 보낸 박스 짐을 다 풀지도 못했다. 이사를 하고 짐을 풀고 박스는 재활용에 잘 버렸다. 그런데 새로운 집에 잘 적응하며 지낼 만한 시기에 갑자기 집주인이 집을 팔아야겠다며 집을 비워 달라고 했다. 아직 3개월도 안된 시기였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에서 오래 사신 분이 알려 주셨다. 중국에서 이런 일은 흔한 일이라는 것이다. 또다시 집을 구해야 했다. 우리는 중국어를 할줄 몰라서 주변 도움이 없으면 이사도, 집 계약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돕는 손길로 적당한 집을 구했고, 이사를 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서야 정착을 할 수 있었다. 중국이 어떤 곳인지 몸소 체험하며 알아 갈 수 있었다.

중국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기 위해서는 관광비자가 아닌 다른 비자가 필요하다. 우리 부부는 중국어학원에 등록하고 학생비자를 받았다. 처음 배우는 중국어였지만, 학창시절 배워 둔 한자가 큰 도움을 되었다. 말하고 듣기는 힘들었지만, 쓰는 것과 글자를 보고 해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사고, 은행 계좌를 만들고,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수 있을 만큼 중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비자를 소유한 외국인은 법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
지정된 교육시설에서 중국어 공부만 해야 한다. 그리고 비자는 일 년마다 새롭게 갱신해야 한다. 비자를 갱신할 때, 중국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담당자가 면담을 통해 확인한다. 한 번은 비자를 연장하러 갔다가 된통 혼나고 온 적이있다. 담당관은 중국 책을 주면서 읽어 보라고 했다. 함께 갔던 일행 중에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어떻게 일 년이나 공부했으면서 이 쉬운 책도 못 읽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담당관은 일 년 비자를 줄 수 없다며, 6개월 비자만 줄 거니까 6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다시 오라고 했다. 우리는 일 년 비자를 받으려고 함께 모여 열심히 공부했다. 함께 갔던 학원 선생님 얼굴 보기가 부끄러웠다.

홈스쿨 교육과정으로 운영되는 작은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나는 같은 학교에서 일손을 도왔다. 한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경력으로 학생들에게 작지만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학생들은 특히 수학을 어려워했다. 한국어로 공부해도 어려울 법한 수학을 영어로 공부해야 하니 학생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홈스쿨 교육과정은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시스템이다. 하루하루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공부한다. 강의식 수업이 아닌 독서실과 같은 책상에서 혼자 공부하는 것이다. 교사가 하는 일은 학생들이 원활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이다. 하지만 학생 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 일을 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래도 곤명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이 학생비자를 가지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분이 많아서 크게 문제가 될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혹 문제가 되더라도 적당한 벌금을 내면 그만이었다. 학교에 정기적으로 경찰이 방문하여 이것저것 묻고 사진도 찍고 했었다. 경찰들과 늘 가까이 있었기에 더욱 안심하고 지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2018년 갑자기 십여 명의 경찰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이곳저곳 사진을 찍고 동영상 촬영을 하며 선생님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했다. 그리고 당장 선생님들의 여권을 가져오라고 했다. 학교에는 한국인 선생님들과 중국인 선생님, 그리고 인도 선생님이 계셨다. 한국분이 학교 책임자이기에 한국인 선생님들의 여권을 모아서 경찰에게 넘겨주었다. 다른 국적의 선생님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 한국인 선생님들은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다른 문제는 없는데, 한 가지가 문제가 됐다. 학생비자를 가지고 일을 한 것이다.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에 갔는데, 중국 경찰은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그때까지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종종 있었던 일이라 더 그랬다. 경찰은 현재 가지고 있는 학생비자는 취소되었기에 한국에 가서 다시 비자를 받아 오라고 했다. 관광비자를 받아서 다시 중국에 들어와 사업자 비자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아무 문제 없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한국인 선생님들은 한국에 갈 준비를 했다.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짐을 꾸리고 집을 정리했다. 처음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기분이 묘했다. 외국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기에 받아들여야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지금 한국에 간다면 다시는 이곳으로 못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이었다. 우리는 이삿짐을 쌌다. 종이박스를 준비하고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짐을 싸두었다. 10개의 박스에 짐을 넣었다. 3년간의 중국 생활을 통해 짐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꼭 필요한 것들만 챙기고 덜 중요한 것들은 남겨 두었다. 중국을 떠나는 날, 남은 선생님들과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가는데 눈물이 났다. 그렇게 돌아온 한국은 또다시 추운 겨울이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다시 중국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중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고 중국에서 필요할 만한 물건들을 챙겼다. 부모님은 여러 가지 반찬거리를 싸 주셨다. 부모님께는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는 말씀 드리지 못했다. 오랜만에 손자들을 본 부모님은 좋아하셨다.
부쩍 커 버린 손자들의 모습 속에서 어렸을 적 함께 보낸 귀여운 이미지를 찾고 계셨다. 관광비자는 무탈하게 잘 나왔다. 중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충분한 쉼을 가졌다.
중국에 남아 계시는 선생님들께도 비자가 잘 나왔으니 곧 만나자고 반갑게 연락했다. 중국에서 경찰서에 갔었던 기억은 사라지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기대감으로 출국할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날. 최대한 짐을 챙겨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중국에서 할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무사히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한 달 정도 학교를 비웠는데, 학생들이 보고 싶었다. 곤명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승객들이 짐을 챙기며 내릴 준비를 하는 동안, 기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우리는 방송을 듣고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방송에서 내 이름과 아내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배○○, 김○○ 승객분은 다른 승객분이 모두 내릴때까지 기다렸다가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내용을 두 번 반복해서 방송했다. 우리 가족은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기 짐을 챙겨 비행기를 빠져나갔다. 승객 중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그의 가족도 있었다. 그 학생과 눈이 마주쳤는데,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짧은 순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왜 남아 있으라고 했을까? 비행기를 타고 있는 이 많은 사람 중에 왜 우리 부부의 이름만 부른 것일까? 좋은 일일까, 안 좋은 일일까?’ 다양한 경우 중에 가장 확신이 가는 것은 한국에 가기 전 중국 경찰서에 갔었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때 경찰은 한국에서 새롭게 비자를 받아 오면 아무 일 없을거라고 했는데, 일이 잘못된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있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비행기 안에서 우리 가족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왜 이리도 부러운지. 아무 일 없이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는 것이 특별한 일이라는 것임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승객들은 우리가 왜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를 것이다. ‘복잡하니까 맨 나중에 내리려나 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함으로 인해 우릴 쳐다보는 다른 승객들의 눈길조차 무섭게 느껴졌다. 마치 우리를 범죄자로 보는 것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우리 가족만 남았다. 승무원이 먼저 우리를 알아보고 말을 걸어왔다. “비행기 출입구에 공항 관계자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가시면 됩니다.”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한국말을 잘하시는 중국 여자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 김○○님 맞으시죠? 저와 함께 이동하겠습니다.” 우리 부부는 두 아이의 손을 각각 잡고 직원분을 따라갔다. 입국 심사대 중앙에 있는 경찰에게 갔다. 경찰은 짧은 헤어스타일에 화가 난 표정으로 우리보다 1미터쯤 높은 곳에 올라 서 있었다. 무서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여권을 가져오라고 했다. 가족 4명의 여권 을 건네주었다. 경찰은 아이들의 여권은 필요 없으니 가져가 라고 했다. 원한다면 아이들은 중국에 입국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딜 가든 함께 있어야 했다. 30분이 넘도록 경찰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싸우는 것 같이 큰 소리가 오고 갔다. 우리 가족에게 벌을 주려고 일부러 입국 심사대 앞에 오랫동안 세워 두는 것 같았다. 다리도 아프고 창피하기도 했다. 입국심사를 마친 여행객들이 짐을 찾으러 이동하면서 우리를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경찰은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는지 우리 부부의 여권을 돌려주었다. 한국에서 받아 온 비자면에는 ‘CANCEL’이란 빨간 도장이 찍혀 있었다.

우리를 인도해 준 중국인 공항 직원분이 경찰과 이야기를 하고 와서 “입국이 거부되었으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합니다. 그리고 지금 타고 오신 비행기를 다시 타고 가야 합니다.”라고 했다. 방금 타고 왔던 비행기를 다시 타고 가려면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입국이 거부되었는지 물어봤다. 이유는 예상대로 ‘불법 취업’이었다. 직원분은 시간이 촉박하니 자신이 짐을 대신 찾아서 비행기 표를 끊어주겠다며 내 신용카드를 달라고 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직원분이 하라는 대로 했다. 중국에 올 때 타고 왔던 비행기는우리 가족을 태우기 위해 출발해야 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출발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타고 왔던 비행기를 다시 타야만 했다. 비행기 좌석은 맨 뒷자리였다. 우리 때문에 기다려 준 승객분들께 매우 죄송스러웠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승무원은 우리 가족의 여권을 달라고 했다.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따로 보관해야 한다고 했다. 여권을주고 자리로 갔다. 맨 뒷자리까지 걸어가는 비행기 통로가 한없이 길고 힘들게 느껴졌다. 여기저기서 ‘저 사람들 때문에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구나.’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과 정신이 지쳐 있어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중국 공항에서 그런 일을 겪으면서 가족에게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마음은 불안했지만, 편안한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둘째 아들은 아직 어려서 그 상황이 신기하듯이 편안해 보였다. 그런데 사춘기에 들어선 첫째 아들에게 그 상황은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곤명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기다리는 순간부터 첫째 아들은 표정이 굳어지며 말이 없어졌다. 부모님의 이름이 방송에서 나오고, 다른 사람이 모두 내릴 때까지 비행기에서 기다리는 동안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과 눈이 마주쳤을 것이다. 입국심사대 앞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발가벗고 있는 것처럼 창피함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비행기에 타고 맨 뒷자리까지 걸어가는 동안 승객들의 불만스러운 눈초리에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아이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엄마에게 계속해서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보채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야 하냐며 엄마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아이를 달래 보려 해도 이미 마음을 굳게 닫은 아이는 눈물을흘리고 있었다. 아이는 3년 전에 중국에 간 것부터 자기 의견은 없었다며 속상해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아들은 힘들어했었다. 자기가 앞만 보며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가 빨리 졸업해서 중국을 떠나고 싶어서라고 했다. 아빠로서 아이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미안한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중국 공항에서는 어떻게든 일을 잘 마무리하고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중국에 갈 때 탔었던 비행기를 다시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데 온몸에 힘이 없었다. 그래도 중국 경찰 앞에서 범죄자 취급받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살 것 같았다. 인천 공항 내에 있는 법무부에서 간단히 조사를 받았다. 입국거부 이유를 기록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가 새벽 5시였다. 법무부 직원분은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보셨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서 나가도 좋다고 했다. 먼저 우리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중국에 있는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드렸다. 우리 가족의 입국 거부 소식을 접하고 함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던 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앞으로의 일을 준비했다.
중국에 남겨진 짐들과 집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지인분께 부탁을 드렸다. 지인분은 우리가 살던 집의 월세 보증금을 돌려받아 그 돈으로 우리가 싸 놓은 짐을 택배로 부쳐 주셨다. 남은 짐들은 필요한 분들에게 기증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디서 아이들의 학업을 이어 가야 할지도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들을 위로해 주는일이었다. 아이는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 학교에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가는 것이 무섭다고 했다. 자기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도 좋으니 가고 싶으면 동생만 데리고 가라고 했다.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 감사하게도 아이는 부모를 따라가 겠다고 했다.

우리 가족에 이어 중국에서 함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던 한국인 선생님들도 차례로 중국을 떠나게 되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함께 모여 아이들의 교육이 연결되도록 방법들을 강구했다. 결론은 한국과 태국에 학교를 세워 학생들이 학업을 이어갈 환경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우리 가정은 태국으로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태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중국에서 돌아온 지 한 달 정도 지난 후, 비행기를 탔다. 3년 전 중국에서 처음 시작했던 일을 태국에서 다시 시작했다. 한 번 외국생활을 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금방 적응되어 갔다.
중국에서 함께 있었던 선생님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한 가정은 미얀마에서 홈스쿨 학교를 담당하고 있다. 또 다른 가정은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한국 학생들 위주로 공부하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 가정은 태국 치앙마이에서 중국에서 했던 일을 이어 가고 있다.

태국에서 4년 7개월이 흘렀다. 그동안 코로나 기간을 가족과 함께 지냈다.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추위를 피하려고 전기장판 위에서 네 식구가 꼭 껴안고 밤을 지냈듯이 우리 가족은 함께 코로나를 태국에서 보냈다. 첫째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 곁을 떠나 한국으로 갔다. 한국의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며 입대할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지금도 가끔 중국 공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때는 너무나 창피하고 힘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때의 일들이 좋은 추억이라고 한다. 위기였지만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군대에 가고, 대학을 가야 할 시기이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어려운 시련을 겪어서인지 앞으로의 일이 담담하다고 한다. 그렇게 부끄러운 일도 당해 봤는데, 그 어떤 일도 견딜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다고 하니 대견스럽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외국에서는 외국인으로 살아야한다. 잠깐 방문하는 외국은 낭만적이지만, 비자를 연장해가며 살아야 하는 재외동포들에겐 그들만의 사는 방식이 있다. 그 나라가 원하는 것을 내어주며 참는 것이다. 그 일이 억울할 수도 있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기에 얼마든지 참아낼수 있다. 한국을 떠나온 지, 7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났다. 이제 한국에서의 삶이 어색하고 불편할 만큼 외국 생활에 적응되어 있다. 앞으로 어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길지 모르지만,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극복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