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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단편소설] 북경의 기묘한 밤
작성일
2024.01.25

단편소실 가작


북경의 기묘한 밤

이윤선(네덜란드)



“저기요.”
북경의 한 슈퍼마켓 냉장고 앞에 서 있던 내 귓가로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시작인가 싶었다. 어디를 가서 내가 좀 어버버 서 있게 되면,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일이 신기할 정도로 자주 생기고는 한다. 만만해 보여서 그러나 싶기도 하고, 말을 잘 들어줄 거 같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타인이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대부분 귀찮은 일을 실어 나를 때도 있기에, 이런 순간들이 그리 반갑지는 않다. 난감함을 마음속으로 감추고,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십 대 중반의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예?”

“그 요거트요, 그거 맛이 없어요. 저기 옆에 있는 다른 요거트 사세요. 가격은 같은데, 저게 훨씬 맛있거든요.”

“아, 그런가요? 고마워요, 알려 줘서.”

다행히 이번에는 내가 도움을 받게 됐다. 그 소녀의 조언에 따라서 냉장고 문을 열고 요거트를 바꿔 쥔 후, 난 그 소녀를 향해서 고마움을 담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중국인이 아니죠? 여기엔 관광객으로 왔어요? 아니면 공부하러?”

“아, 그냥 잠시 머물고 있어요.”

“그렇구나. 장 보고 있는 거예요? 내가 맛있는 거 골라 줄까요?”

이쯤에서 어린 소녀가 좀 오지랖이 넓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눈빛을 빛내며 호의를 베풀겠다는 어린 소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소녀와 슈퍼마켓의 곳곳을 돌며 보온병이며, 목욕제품에 수세미까지 둘러보며 이야기꽃을 피우게 되었다. 소녀는 내가 마치 외계인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이것저것 제품들을 내게 소개해 주고 싶어 했고, 난 그 소녀가 나를 이끌어 대는 데로 끌려가 주며 그
소녀의 설명을 들어 주었다. 솔직히 소녀의 설명들이 재밌기도 했고, 그런 소녀의 모습이 좀 귀여웠다.

“이제 어디로 가요?”

계산을 마치고 슈퍼마켓이 있던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소녀는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내가 향할 곳을 솔직히 소녀에게 말을 해줘야 되나 잠시 고민이 됐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내가 지내고 있는 곳을 소녀에게 말해줬다.

“아, 그 건물 나도 알아요. 번호 있어요? 내가 연락해도 돼요?”

이번 질문에서는 좀 망설여졌지만, 오래 쓸 휴대폰 번호는 아니니, 소녀에게 알려 줘도 문제 될 건 없을 듯했다.

“다음 주 토요일에요, 부모님과 휴대폰을 사러 다시 이곳에 올 거예요. 그때 우리 부모님도 만나고, 우리 집에도 놀러 올래요?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요.”

아, 소녀여. 이건 너무 급한 전개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소녀는, 다음 주에 자기 집에 놀러 와서 하룻밤 자고 가라고 말을 해 오고 있었다. 소녀는 부모님과 휴대폰을 사러 갈 건데, 나보고 같이 다녀 주며 휴대폰을 골라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나도 그리 간단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그 소녀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골똘히 바라보았다. 소녀는 이런 내 반응이 이상하지 않다는 듯이,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소녀의 눈빛이 맑았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소녀의 모습에, 나는 뭐에라도 홀린 듯 다음 주에 이곳에 소녀와 부모님을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좋아요, 그럼 잘 가요! 다음 주에 이곳에서 오후 4시에 만나요.”

그렇게 나는 숙소로 돌아와서도 어리둥절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낯선 소녀와 그 소녀의 부모님을 따라 휴대폰 가게를 돌아보다가, 그들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오기로 약속을 하고 왔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 험한 세상에 뭘 믿고 그런 약속을 타인에게 하고 왔는지,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렇게 한 주를 흘려 보냈다.

***

드디어, 문제의 토요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을 했다. 약속 장소에 시간에 맞춰 갈지에 대해 망설여지는 마음을 아직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하룻밤을 지내고
올 간단한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서고 있었다. 멀리 그 소녀를 만났던 슈퍼마켓이 있는 건물이 서서히 보이자, 그 소녀와 부모님이 그곳에 서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까지 되었다.
하지만, 그 건물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곳에 서 있는 소녀와 그녀의 부모님의 모습이 뚜렷이 내 시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반가워요, 우린 샤오린 아빠, 엄마예요.”

“안녕하세요,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우리 샤오린과 우연히 만났다고요? 오늘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고 해서 좀 놀랐지만, 우리 샤오린이 원래 좀 그래요. 그래도, 이렇게 이해해 주고 받아 주어서 고마워요. 외동아이라서 사람을 좋아해서 그래요.”

난 그 소녀의 이름이 샤오린이라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샤오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그 소녀는,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며 옆에 서 있었다. 그렇게 우리 넷은 휴대폰 가게로 어색한 동행을 이어 갔고, 그 가게에서 샤오린은 제일 비싼 최신폰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폰의 반짝거리는 빛만큼 샤오린 부모님의 낡은 회색빛 옷은 사그라드는 듯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얻고 활짝 핀 외동딸의 얼굴을 바라보는 얼굴만은 꽃처럼 밝았다.

휴대폰 가게에서 나온 우리는 바로 앞 정거장에서 마을 버스를 탔고, 구불구불 이 마을 저 마을 지나던 버스는 한참을 달린 후 한 마을 정거장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수확이 끝난 누런 들판이 여기저기 휑하게 놓여 있었고, 마을 어귀를 지나쳐 들어가니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군락이 눈에 들어왔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쳐 녹색 철문을 열고 그들이 들어가자, 나도 따라 들어섰다. 마당에 들어서자 사납게 짖어 대며 목에 걸린 쇠사슬 소리를 거칠게 내는 개 한마리가 나를 반겼다. 개 목에 걸린 쇠사슬이 너무 길어, 개
를 그냥 지나칠 방법이 없는 마당의 구석 자리에 나는 발이묶여 있었고, 그런 나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던 소녀가 개의 목줄을 잡아주고 나서야, 나는 개를 지나쳐 집 안으로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집 현관을 들어서자 바로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눈에 들어왔다. 회색빛 시멘트 색 그대로 아궁이와 찬장, 그리고 벽에 놓인 선반 몇 개가 다인 단출한 부엌이었다. 당황하고 있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소녀가 무안한 눈빛을 내게 보내오며 내 손목을 이끌어 오른쪽 벽에 있는 문 안으로 나를 이끌었다. 방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이번에는 당황스러운 얼굴과 눈빛을 숨길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대로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방은 직사각형으로 좀 길었는데, 오른편에는 단상처럼 높이를 좀 올려 잠자는 곳으로 사용하는지, 이불과 베개가 잔뜩 올려져 있었고, 왼편으로 평평한 곳에는 꽤 큰 크기의 원형 탁자와 의자들, 그리고 서랍장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방 전체가 회색 시멘트와 흙색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원형 탁자에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계셨다.

“오늘 온다는 손님이 드디어 왔나 보네.”

“할머니, 여기 제 친구 준이에요. 준, 우리 할머니예요.올해 연세가 83세예요. 귀가 잘 안 들리시니 크게 얘기해야 해요.”

“아, 안녕하세요. 전 준이라고 해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소녀가 나를 친구라고 소개해서 놀라고 있었다. 소녀는 기껏해야 십 대 중반일 듯했고, 나는 아직 그녀의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있었고, 그녀를 이제 겨우 두 번 만났을 뿐이었다. 나이야 좀 차이가 나도 친구가 될 수는 있지만, 서로를 잘 모르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녀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호호, 우리가 영광이에요. 난 내 집에 외국인을 초대한 건 처음이거든. 중국어를 잘하네요?”

“아니요, 그냥 기본적인 대화만 할 줄 알아요.”

“난 하늘을 보면 늘 신기했거든, 하늘에 저 날아가는 것 들이 비행기라죠? 그걸 타고 여길 온 거지요?”

“아, 네에. 중국에 올 때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재밌나요? 무섭지는 않아요? 너무 높은데.”

“후후, 예, 좀 높아서 긴장도 되고 재밌어요. 할머니께서도 한번 타 보고 싶으세요?”

“아니, 난 무서워서. 그냥 하늘에 높이 날아다니는 거나 쳐다보는 게 좋은 거지.”

옆에서 나와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녀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우리 오늘 좀 바빠요. 손님과는 이따가 다시 얘기할 기회를 드릴게요. 준, 우리 오늘 갈 곳이 많아요. 큰아버지댁에 저녁 먹으러 가야 해요.”

“응? 큰아버지댁?”

“응, 내가 준이 온다고 했더니, 큰아버지댁에 저녁 먹으러 오라고 하셔서. 여기서 멀지 않아요. 이 마을에 우리 친척들이 다 모여 살고 있거든요.”

그렇게 나는 소녀의 손에 이끌려, 졸지에 그녀의 큰아버지댁에까지 방문을 하게 되었다.

***

정말 소녀의 큰아버지댁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대가족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물만두를 만들어 먹을 거라면서, 물만두를 만들어 본적이 있는지 물으며, 내게 직접 만들어 보라고 만두속과 반죽을 내밀었다. 갑자기 만난 대가족도 낯설었지만, 만나자마자 대뜸 그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내 물만두 빚는 솜씨를 보여야 되는 이 상황의 전개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렇게 내가 손을 씻고 물만두를 하나둘씩 만들어 낼 때마다, 그 대가족의 구성원들은 마치 내가 하늘의 별을 따다 쟁반에 하나씩 올려놓는 걸 보기라도 하는 듯, 내가 내려 놓는 물만두 하나마다 요란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즐거워했다.

만두를 다 만들고 끓는 물에 만두를 쪄낸 후, 윤기 나는 물만두가 잔뜩 놓인 접시를 앞에 두고, 나는 그 집의 큰 어른인 큰아버지와 독대를 하게 되었다. 근처의 큰 화장품 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일한다는 큰아버지는, 그냥 보기에도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갖고 있는 근엄함이 묻어나면서도, 친근하고 어진 미소를 가진 분이었다.

“한국에는 화장품 공장이 많지요?”

“예? 저 그게, 제가 그쪽 분야는 잘 모르긴 하지만, 아마 많을 거예요.”

“그렇죠? 한국은 화장품 회사가 발전이 많이 되어 있어서 좋은 거 같아요. 그렇게 일하는 사람들 월급이 얼마나 돼요? ”

“월급이요? 으음, 글쎄요.”

물만두를 앞에 두고 한국의 화장품 업계 동향과 그 분야 사람들이 받는 월급 얘기를 하게 될 줄 몰랐던 나는, 물만두를 먹어야 되는 건지, 아니면 비즈니스 얘기를 진지하게 해 보고 싶어 하는 큰아버지의 기대감에 맞춰 드려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물만두를 오물거리면서는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앞의 어르신의 기대치를 맞춰 드리지 못할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투명한 만두피가 쫄깃해 보이는 물만두를 입 안에 몇 개 넣어 보지도 못하고, 나는 그렇게 큰아버지와 비즈니스 회담 독대를 몇십 분을 해 드리고 나서야, 그 탁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웬일인지 소녀는 큰아버지댁에서는 입 하나 벙긋하지를 못했고, 순하고 온순한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큰아버지의 관심이 TV 프로그램으로 옮겨가고 나서야, 우리는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큰아버지댁을 벗어나 자마자, 소녀는 예의 그 발랄한 십 대 소녀로 돌아와 재잘거림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엄마가 일하는 기숙사로 가야 돼요.”

“기숙사?”

“거기에 우리 씻으러 가야 해요. 엄마는 이미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어, 어? 씻으러 간다고? 그곳에? 우리 둘이서?”

내 질문이 재밌다는 듯 생글생글 웃던 소녀는, 내 손목을 이끌고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골길 안으로 걸음을 재촉하듯 옮겨갔다.

***

낮에 누렇게 보이던 휑한 들판들은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는 온통 먹색만 뿌려 대고 있었고, 들판 옆 시골길 옆에 간간이 하나씩 놓인 가로등만이 희미한 노란빛으로 우리가 갈 곳의 방향을 비춰 주고 있었다. 이 사방이 캄캄한 휑한 들판에, 소녀와 둘이서 걷고 있으니, 우리 둘의 발자국 소리만 들판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들판에 떨어질 듯 들판 옆 시골길은 좁았고, 나는 소녀가 이끄는 방향대로 조심조심 발을 디뎌 걷기에 바빴다.
이 캄캄하고 쥐 죽은 듯 조용한 시골길이 무섭다는 생각보다,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쏟아질 듯 나를 비추고 있는 밤하늘의 별들을 간간이 한 번씩 바라보며 소녀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이 점점 넓어지더니 한 학교 건물 앞에 우리 둘은 도착해 있었다.

밖을 내다보고 계셨던 건지, 우리가 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자 소녀의 어머니가 이미 걸어 나오고 계셨다. 문을 열어주며 내게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소녀의 어머니 모습에, 또다시 도착한 낯선 곳에서 긴장감을 느끼고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싶었다.

“들어가요.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야 해요.”

소녀는 늘 해 오던 일인지, 익숙한 걸음을 옮겨 계단을 통해 2층으로 향했고, 나도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내 뒤를 따라 소녀의 어머니가 걸어오셨는데, 난 그제야 소녀의 어머니가 걸음을 빨리 걸어야 할 때는, 한쪽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녀의 빠른 걸음을 따라 빨리 걷던 걸음을, 나는 그제야 조금 천천히 걸으며 속도를 늦췄고, 소녀의 어머니가 내 등 뒤에 좀 더 가까워져 오는 걸 느
끼고 나서야,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거침없이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 나에게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탁자가 놓여 있었고, 문의 오른편으로 샤워기가 벽에 몇 개 매달려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뭐해요? 얼른 들어와요. 씻으려면 옷을 벗어야죠.”


“어, 어.”

당황스럽게 대답을 내뱉고 있는 내가 재밌는지, 뒤이어 방으로 들어서는 소녀의 어머니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소녀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거침없이 옷을 벗더니, 샤워기 아래에 다가가 물을 틀었다.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내가 난처해하고 있는데, 소녀가 나를 재촉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이렇게 낯선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남의 학교 기숙사에 와서 샤워를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
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한쪽 구석에서 쭈뼛쭈뼛 옷을 벗고, 소녀가 샤워하고 있는 곳 옆에 다가가 그 옆의 샤워기 물을 틀었다. 샤워기의 물이 한껏 나오지 않고, 졸졸 흐르듯이 나오는 물이, 또 차가웠다. 그렇게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를 등지고 차갑게 졸졸 흐르는 샤워기 밑에 서 있으려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얼추 샤워를 다 마쳐가자 큰 수건이 하나 얼굴 앞으로 내밀어졌다. 소녀의 어머니
가 여전히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내게 수건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렇게 건네받은 수건으로 온몸의 물기를 닦아내자 마자 옷을 꿰차 입었다. 젖은 머리로 뽀송한 얼굴을 내게 내 밀고 해사하게 웃는 소녀는 개운해진 모습이었지만, 난 여전히 이 돌아가는 상황이 민망하기만 해, 그저 말없이 젖은 머리만 수건으로 꾹꾹 눌러댈 뿐이었다.

샤워를 마친 후 건물의 불을 모두 끄고 문을 여닫은 후,우리들은 다시 그 어둠이 짙게 깔린 들판 옆 좁은 시골길을 따라 걸어 소녀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둠이 잔뜩 묻어난 방 안에는 호롱불이라고 해도 믿어질 밝기의 램프 하나가 켜져 있었다. 소녀의 할머니는 이미 침상에 올라가 이불 안에 앉아 계셨다

“할머니, 저희 돌아왔어요.”

“어, 그래. 재밌었냐? 큰아버지댁에서도 시간 잘 보냈고?”

“예, 큰아버지가 준과 대화하는 걸 즐거워하셨어요.”

“잘했다, 잘했어. 준, 준도 즐거웠어요?”

“예, 좋았어요. 물만두도 만들어서 잘 먹었어요.”

“물만두를? 준이 물만두를 만들 줄 알아요?”

“후후, 그냥 옆에서 보여 주시는 거 흉내 낸 정도였어요.”

“잘했네. 어서 여기 와서 누워요. 밤이 늦었으니 피곤하겠네.”

난 소녀의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그녀가 앉아 있는 침상 옆 자리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누구 하나, 내가 잠자리 옷으로 갈아입을 걸 권하지 않았기에, 그냥 그대로 침상에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자리를 잡자, 소녀가 내 왼편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우리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려니, 조금 후에 소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소녀의 할머니 오른편 침상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를 잡자, 소녀의 아버지가 호롱불 같던 램프의 스위치를 껐고, 방 안에는 머리맡벽에 나 있는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만 흐릿하게 비쳐 들게 되었다.

소녀, 나, 할머니, 소녀의 어머니, 그리고 소녀의 아버지. 그렇게 다섯 사람이 한 방에서 침상 위에 이부자리를 깔고, 각자의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난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낯선 이들과 한 방에서 잠을 청하게 된 이 밤의 상황을 이해해 보려 노력 중이었다. 불이 꺼지고 나서는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말 한마디 없이 고요했기에, 난 왠지 긴장되는 마음에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소리가 크게 들릴까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구름이 흘러가는지 간간히 달빛이 멀어져 나갔다가, 다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반복하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잠이 오지 않을 밤을 위해 별을 마음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

잠이 오지 않을 밤이라고 생각했는데, 피곤했었는지 나는 꽤 깊이 잠이 들었던 듯했고, 잠결에 희미하게 들리는 부산스러움을 느끼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내가 눈을 뜨니, 이미 소녀의 부모님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가 일을 하는 중이었고, 소녀의 할머니는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고 계시던 중이었다.

“준, 일어났어요?”
“아, 제가 늦잠을 잤나요?”
“아니, 우리가 일찍 일어난 거예요. 봐봐, 샤오린도 아직자고 있잖아.”

할머니의 말을 따라 왼편을 바라보니 샤오린의 부스스한 머리카락만 이불 밖으로 빼꼼히 흘러나와 있었다. 둘둘 말고 있는 이불 밖으로 발도 하나 삐져나와 있는데, 그 앳된 발가락이 샤오린이 아직 어린 소녀임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샤오린, 일어나. 손님 가기 전에 아침을 먹여서 보내야되지 않겠니? 어멈이 쌀죽을 만들고 있으니, 거의 다 됐을거야.”

할머니의 외침이 들리고 나서야 꼼지락꼼지락 샤오린의 발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음, 벌써 일어날 시간이에요? 후아-으-음, 조금밖에 안 잔 거 같은데 정말 아침이네.”

“그건 네가 매일 아침마다 하는 얘기고.”

“후후, 아침에 일어나는 게 제일 힘드니까 그렇죠.”

때마침 소녀의 어머니가 큰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릇 안에는 훈기가 솔솔 올라오는 뽀얀 쌀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얼른 씻고 와요, 아침 먹게.”

“알겠습니다. 샤오린, 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앞마당으로 가면 수돗가가 있어요. 아, 개를 무서워하죠? 잠시만요, 나랑 같이 나가요.”

우리가 마당으로 나가자,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가 거칠게 나며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집 뒤편에서 소녀의 아버지가 마당으로 나왔고, 손에 들고 있던 마대 자루를 휘휘 몇 번 허공에 휘둘러 대자, 개는 그 마대 자루와 얽힌 경험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그 몇 번의 손짓에 금세 조용해졌다. 그렇게 나는 소녀의 뒤에 숨어 수돗가에서 물을 대야에 받아 얼굴을 씻었다. 그 서슬 퍼런 개의 눈빛 덕분에, 칫솔을 가져와 양치질을 할 엄두는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간단히 씻고 방 안으로 돌아가니, 이미 부모님과 할머니는 넓은 원탁에 앉아 계셨다. 내 앞으로 놓인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죽에 간장을 한 방울 떨어뜨리니, 간장이 하얀 쌀죽 사이로 예상치 못한 모양대로 흘러드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흘러드는 모양이 내가 이 마을에 와서 지낸 어제 하룻밤 같다는 생각에, 나는 그 흘러드는 모양의 끝에 어떤 형상이 맺어질지 눈을 떼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하지만,그 형상이 끝내어지기도 전에, 소녀가 내 수저를 뺏더니 내 쌀죽을 휘휘 저어 간장을 쌀죽과 섞어 주었다. 이제 남은 건 노르스름하게 변해 버린 희끄무레한 쌀죽뿐이었다.

든든히 쌀죽을 먹고 나니, 소녀의 어머니가 내게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어제 휴대폰 가게 앞 좌판에서 산 롱안이라는 과일이 줄기에 매달린 채 가득 들어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사양을 하자, 숙소에 돌아가서 먹으라고 계속 봉지를 내미는 어머니의 손길을 외면하기가 민망하여, 결국 그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 내가 이제 돌아갈 시간이라고 인사를 건네자, 하룻밤의 정을 말해 주는 듯, 할머니는 내 손을 꼭 감싸 쥐며 촉촉해진 눈으로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 왔다. 마당 한 구석에 쭈그려 앉은 개를 뒤로 하고, 소녀의 부모님과 할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소녀와 함께 아침 햇살이 밝게 빛나는 마을길을 걸어 나왔다. 버스 정류장까지 소녀는 별 말이 없었다. 짧은 만남 뒤에 헤어짐에서 꺼낼 수 있는 말을 찾기에 소녀는 아직 너무 어렸고, 나 또 한 그런 경험이 없어 적당한 말을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곧 도착한 버스에 오르며, 소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미소를 건넸다. 소녀 또한 생글생글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혼자 버스에 올라타 자리에 앉자,어제부터 내게 일어난 일들의 무게감이 어깨에서 하나둘씩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네, 그 짧은 순간에. 풋- 웃음이 나왔다.

***

그렇게 숙소로 돌아온 내 손에는 롱안 과일이 잔뜩 들어 있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 과일 봉지를 바라보며 풋-하고 다시 한번 싱거운 웃음을 뱉어냈다. 마치 하룻밤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내 손에 이 과일 봉지가 남아 있으니 단지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숙소에서 롱안 과일을 만지작거리며 샤오린에게 다시 전화를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룻밤 신세를 지고 왔으니, 숙소에 잘 도착했다고 말하며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다이얼을 눌
러 샤오린이 새로 개통했던 그 휴대폰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몇 번 울리다 네트워크 회사의 자동 메시지로 넘어갔다. 그렇게 몇 번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없는 번호라니. 황당했다. 샤오린의 집번호라도 받아 둘걸 싶었지만, 이미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샤오린이 슈퍼마켓에서 내 번호를 받아 갈 때 내게 전해 줬던 그녀의 학교 기숙사 번호를 내가 갖고 있다는 게 생각이났다. 그렇게 월요일까지 기다리다, 그 학교의 기숙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뚜-뚜- 신호가 가고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문의 좀 드려도 될까요?”

“예, 말씀하세요.”

“거기 샤오린이라는 학생이 머물고 있나요? 통화 가능할까요?”

“샤오린이요? 음, 그런 이름의 학생은 이 번호로 연결되는 방에는 머물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

“예? 확실합니까? 샤오린이라고, 십오 세에서 육 세 정도되는 여학생입니다.”

“예, 확실해요. 그런 이름을 가진 학생은 이곳에 없습니다.”

전화를 끊고도 내 얼굴은 황당함에 굳어져 있었다. 샤오린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새로 개통했던 휴대폰도 없는 번호가 되었고, 샤오린이 전해 주었던 학교 기숙사 번호로 전화를 해도 샤오린이라는 소녀는 그곳에 없다고 했다. 샤오린의 집주소는 받아 둔 적이 없었고, 마을버스를 타고 간 기억만 있지, 그곳에 혼자 찾아갈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과연 돌아간다고 해도, 그 집이 정말 그곳에 있을지 이젠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 방에 남아 있는 롱안 과일만, 그리고 그 롱안 과일이 잔뜩 담겨 있던 비닐봉지만, 그리고 그 비닐봉지를 내게 건 네던 환한 미소의 샤오린 가족들의 얼굴만 내게 남겨져 있게 되었다. 북경의 기묘한 밤은 그렇게 내게 기억만 남기고, 실체는 남지 않게 되어 버렸다. 이제는 그게 실제 있었던 일이 었는지, 내가 꿈이라도 꾼 거였는지 헷갈리는 상황까지 되었 다. 북경의 기묘한 밤에, 나는 꿈을 꾼 거였을까.


난, 홀린 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