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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한 편씩 읽기

[체험수기] 굴 캐는 여자
작성일
2020.02.12

[체험수기 - 가작]



굴 캐는 여자

 


오진영 / 뉴질랜드


“할머니. 학교에 다녀올게요.”

“아니지. 할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해 봐.”

 벌써 꽁무니를 반쯤 뒤로 뺀 아이는 시키는 대로 다시 지껄이고는 뒤도 안 보고 달아난다. 그나마 인사를 하고 나서는 것만도 다행이니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할머니의 말을 따라주는 것만으로도 성공이잖은가. 그 애는 무슨 인연으로 나를 만나 맘고생을 하는지? 마트에 갈 때마다 손에 들려주는 과자 봉지에 현혹이 되어 아이는 내 말을 곧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망아지처럼 날뛰는 여덟 살 사내 아이는 그렇게 조금씩 가정교육에 길들어 갔다.

“할머니가 계셔서 아이가 많이 차분해져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집에 심방을 오신 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치하를 했다. 애 엄마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가 변해가는 모습에 좋아했다.

 어린 게 남의 나라에 와서 기죽지 않고 “왔쮸네임”(What is your name?)을 외치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귀찮게 따라다닌다고 했다. 영어가 쑥쑥 늘어간다고 좋아서 아이 바보가 된 엄마. 오십에 얻은 외동 늦둥이라 어리광을 맘껏 키워 온 것이었다. 남 보기에는 강철같이 강한 여자였지만 아이에게는 언제나 솜사탕처럼 부드러웠다.

한국에서 남편과 이혼을 했다고 들었다. 기분 전환을 하려고 어느 단체를 따라왔다가 무작정 눌러앉은 모양이었다. 그녀다운 용기일까? 무모한 행동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어느 날 한국으로 날아가 아들까지 데려왔다. 겁이 없는 사람일까? 배짱이 좋은 걸까? 대단한 여자였다.

 여기는 남의 나라가 아닌가. 내가 살고 싶다고 그냥 살 수 있는 땅이 아니다. 결국 출국 명령을 받아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이는 남의 집에 맡겨놓고 나갔다. 어떻게든 다시 들어 오겠다는 뜻이었다.

몇 달 만에 다시 이 땅에 발을 들였다. 어떤 방법으로 들어왔는지는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원래 성(姓)에서 스펠링이 바뀐 다른 성을 쓴다고들 말했다. 남의 입을 통해 들은 말이라 확신하기는 힘들다. 남의 비밀을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와 함께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집시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 소문을 들은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찾아오셨다. 모자를 돕기로 나선 목사님. 좋은 은인을 만난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로 마리아라는 영세명까지 있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목사님을 따랐다.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고 성도들도 그녀를 따뜻하게 보살폈다. 살아갈 의지가 생겼다.

목사님이 보증을 서 임시 비자도 받으니 조금은 편하게 살 수가 있었다. 몸을 사리지 않고 일도 잘해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그럭저럭 안정이 된 상태였다. 생활은 남자같이 거칠어도 속은 인정 많고 따뜻한 여자임을 한 지붕 밑에 살면서 알았다.

“우리 할머니 최고로 예쁘게 해 드려야지.”

성당에서 영세를 받던 날 그녀는 그리 호들갑을 떨며 내 머리 손질을 해 주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살게 된 인연으로 아이에게는 엄한 할머니가 되어야 했다. 아이는 엄함 속에 사랑이 있다는 걸 눈치로 알아버렸다. 나날이 괜찮은 녀석으로 달라졌다. 한솥밥은 안 먹어도 가족처럼 정이 들어갔다.

그 개구쟁이가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단다. 그들은 지금 학교 가까운 지역(더니든)으로 내려가 살고 있다. 하루하루가 행복할 것이다. 모자의 금의환향할 날이 머지않아서 기대가 크다.

 

 그녀와 달리 딸의 초청으로 영주권을 쥐고 당당하게 사는 나. 그녀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참 오랜 세월을 혼자서만 살아온 사람이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처음으로 아이들 가족과 들썩이며 사는 게 불편했다. 무엇보다 이민 초기에 정착하기 힘들어하는 딸과 사위를 지켜보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삶의 질을 높여 살고 싶다나. 안정된 직장을 팽개치고 와서 겨우 남의 가게에 허드렛일을 나간다는 사위가 민망하고 안쓰러웠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 줄 알지만 견디기 힘들었다. 일 년 남짓. 백기를 들고 자유로운 삶을 택했다. 말도 안 되고 문화도 다른 여기에서 혼자 사는 건 안 된다고 부정하는 아이들을 뿌리쳤다.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엄마를 내쫓은 딸이라고 했단다. 자식이 좋아할 리가 없는 에미였다.

남의 말 좋아하는 건 이민 사회가 더한 것 같았지만 무슨 상관이람. 지금은 일찍이 잘했다며 내 선견지명을 칭찬한다.

첫 번째 인연이 이 집이었다. 우리는 궁합이 잘 맞았는지 사이좋은 고부처럼 때로는 모녀같이 구순하게 지냈다.

 그녀의 직업은 미용사였다. 돈이 없던 그녀는 작은 셋집에서 간판도 달지 못한 미용실을 하고 있었다. 십수 년을 해왔다는 경력이 입소문을 탔는지 그런대로 손님들이 찾아와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호탕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한 몫을 더 했다.

가진 것은 없어도 손이 큰 여자였다. 손님들에게 베푸는 게 몸에 익숙했다. 바쁜 와중에도 점심때가 되면 국수도 말아내고 감자도 삶아 대접했다. 호박이나 옥수수도 쪄서 같이 먹고 수다 판을 펼치며 넉살도 좋았다. 너그러운 사람을 따르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좁은 집안이 여자들 웃음소리로 가득 차곤 했다.

만만한 사이의 단골이 오면 춤을 가르친다고 머리에 책을 이고 꼿꼿한 자세로 스텝을 밟았다. 제법 놀아본 몸짓이었는데 그 재롱이 밉지 않았다. 여자들이 그를 흉내 내고 따라다니며 깔깔거렸다. 잠깐이라도 세상 근심을 잊도록 해주는 그녀만의 특기였다.

쌀쌀한 겨울날에는 벽난로에 벌겋게 불을 피워 손님들을 오래 잡아두었다. 틈만 생기면 어디서 주워왔는지 뒷마당에 모아놓은 땔감들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가난한 티를 안 내고 억척으로 부티를 내는 대단한 여인.

내 친구들이 오는 날이면 어르신들 특별 대우가 대단했다. 딸 노릇을 곧잘 해 주었다. 우리는 잘 지내는 한 지붕 두 가족이었다.

 하루 일이 끝나고 어둠이 내리면 그녀의 가슴 속에는 밤보다 더 까만 두려움이 덮쳤다. 낮의 활기는 생판 다른 사람의 것처럼 기가 죽어 흐느적거린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 무섭게 목을 조여오기 때문이었다.

“저는 언제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또 그때가 되어 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비자 만료일이 코앞에 왔다는 한탄이었다. 맥을 놓고 주저앉아 넋두리를 지껄였다. 서글픈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리기도 했다. 보기에 딱했지만 딱히 위로할 말이 없었다.

남의 나라에서 영주권도 없이 살아가려니 얼마나 애간장이 탈런지 짐작이 되었다. 매번 목사님을 괴롭혀 드려야만 사는 자기 인생이 괴로웠다. 어떡하면 홀로 설 수 있을까? 더 고생하지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하고 싶은데 참아야 했다.

 그런 날은 잠도 못 자고 설쳤다는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아침이 밝아와서 밖을 내다보면 그녀의 차는 자리에 없었다. 그가 간 곳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굴을 따러 바닷가에 가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가 억척을 키운 것인가. 거친 굴을 미친 듯이 잘도 땄다. 페트병에는 깐 굴이 가득 찼다. 배낭에는 껍질 채로 한나절 수확이 만만찮았다. 속상할 때 달려나갈 수 있는 바닷가가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굴만 따려고 바닷가에 가는 게 아니에요. 이 년의 신세가 왜 이 모양인지 한탄도 하고요. 소리쳐 울기도 해요.”

태즈메이니아 파도에 그리움을 띄우다 보면 하염없이 눈물이 나온단다. 못 견디게 설움이 복받치면 인기척 없는 껄끄러운 굴 밭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소리쳐 울기도 했다. 한바탕 응어리를 풀어내면 얼마간은 견딜만하다고 했다. 딱하고 측은했지만 들어주는 일 말고는 별 방법이 없으니 안타까웠다.

 집 안 가득 바다 냄새를 풍기며 굴을 깠다. 언제 울고 팔자타령을 했냐는 듯 솜씨가 날렵하고 천연덕스럽다. 달래줄 사람이 없는 자기 처지를 반전의 비결로 버텨갔다. 어디서 생긴 인내심일까?

 굴은 고급 식품이다. 비싼 해산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나라에서는 특히 더 귀하고 비쌌다. 쉽게 사 먹기가 어려웠다. 방금 깐 싱싱한 굴을 병에 담아 싸게 파니까 주문이 늘 밀려있었다.

어려서 바다 근처에 살았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굴을 까는 기술이 장난이 아니었다. 미용실에 손님이 없을 때는 바닷가로 달려나갔다. 그 수입이 더 짭짤했다. 그러나 단속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 위험 부담이 늘 있어서 기다리는 사람도 애가 탔다.

 ‘바다의 우유’라는 굴을 좋아해서 입덧을 했을 때도 얼큰한 어리굴젓으로 속을 가라 앉혔다. 이 나라에 와서 그녀 덕에 물리도록 먹어본 것도 내게는 잊을 수 없이 좋은 추억이었다.

먹음직스럽게 회무침을 잘 만들었다. 굴 반 채소 반이었다. 커다란 접시에 푸짐하게 담아 내오면 내 입이 마냥 호강스러웠다. 지금도 가끔 입맛을 잃으면 그때의 굴 회무침이 떠오르고 입에 침이 고인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비닐봉지에 가득 민들레가 담겨왔다. 깨끗하게 다듬어 소금물에 여러 날 푹 삭힌다. 생선 가게에서 얻어다가 담근 갈치속젓도 참 잘 삭았다. 그 젓으로 민들레 김치를 담그면 맛이 기가 막혔다.

역시 전라도 손맛인 걸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 맛에 이미 길든 교회 분들의 주문에 작은 그릇들이 채워져 갔다. 그녀가 부업으로 하는 또 하나의 솜씨 자랑이기도 했다. 손맛도 특별했지만 교회 분들의 도와주려는 마음이 더 큰 것으로 보였다. 모두가 고마운 분들이었다. 외국에서 아들 하나 잘 키우겠다며 발버둥을 치고 살아가는 여인의 처절한 노력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때로는 남의 집에 반찬을 해 주려고 출장도 다녔다. 아이를 봐주러 다니기도 했고 농장에서 고추도 땄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 해냈다. 언제쯤 그녀가 원하는 남자가 나타날까?

뉴질랜드에 뿌리내려 살려면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와 결혼하는 방법이 최고다. 한국 남자 말고 현지인을 만나고 싶어 했다. 한 번 실패한 결혼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여기 문화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외로우시면 바닷가에 나가서 울어보세요.”

 심심하면 내게 하는 우스갯소리였다.

어떤 할머니가 자식을 따라 이민을 왔다. 다들 일하러 나가고 혼자 남으면 외롭기 그지없어 밖으로 뛰쳐나왔다. 말도 할 수 없고 길도 모르니 어디 한 곳 갈 곳이 없었다. 집 가까운 바닷가에 나갔다. 모래밭에 주저앉으니 고향 생각, 친구들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시퍼런 파도는 성난 듯이 밀려들었다. 갈매기와 벗을 하며 울고 또 울었다.

어느 날이었다. 점잖게 생긴 남자가 손을 내밀어 우는 여인을 일으켰다. 깜짝 놀라서 정신을 차리고 바라봤다.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부드러운 웃음과 태도에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자석에 이끌리듯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그 남자는 얼마 전까지 변호사를 했던 이 나라 신사였다. 늦팔자가 좋았는지 여인은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소문이 사방에 돌은 실화라고 했다. 이민 사회에서 누군가가 외로워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알아요. 할머니에게도 그런 행운이 있을지.”

“그러는 ㅇㅇ엄마가 나가봐요. 내 팔자에는 그런 거 없거든….”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렸다.

 

 그녀가 뱃사람 샘 할아버지를 처음 알게 된 사연도 바로 그랬다. 아침 일찍 물고기를 잡고 배를 끌어 올리다가 굴을 따던 그녀와 마주쳤다. 샘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들과 함께 자주 바닷가에 간다며 나갔다. 굴 수확이 적은 것에 비해 시간은 많이 길어졌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며 제 엄마를 찾았다.

“네 엄마가 어딜 갔기에 그리 안 보이는지 모르겠구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아이가 신바람이 났다.

“울 엄마 데이트 갔을 거예요. 아마 샘 할아버지랑 키스하러 갔을걸요.”

아이의 주절대는 말에 너무 놀랐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녀석이 설쳐서 제 엄마 일을 그르칠까 봐 걱정되었다.

“요즘 좋은 일 생겼는데 어찌 되어 가는 거야? 말해 주면 진심으로 축하해 줄게.”

 나이가 많은 키위(뉴질랜드 백인)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래서 선뜻 밝히기를 꺼렸던 듯싶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라도 있으면 덜 외로우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통역사가 되어 그를 데리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집에 찾아온 샘 노인은 뒷마당에 어지럽게 놓인 땔감들을 모아 얌전하게 정리를 해 주고 갔다. 남자의 손길이 금방 티가 나서 고마웠다. 그녀가 많이 의지해도 되겠구나 싶게 푸근한 사람이었다.

 바닷가 근처에 살면서 배를 띄워 물고기를 잡는 어부라고 했다. 굴을 따러 나가면 데이트도 하는 모양이었다. 영어를 배우겠다고 부담 없이 집에 데려오기도 하고 같이 밥해 먹고 놀다 가는 날이 많아졌다.

 이른 아침에 잡은 물고기 몇 마리를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오는 날도 있었다. 그녀가 없으면 높직한 빨랫줄에 걸어놓고 갔다. 포도송이나 과일 몇 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해서 웃겼다. 야옹이에게 뺏길까 봐 꾀를 쓰는 모습이 재밌었다. 인정이 많은 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의사소통이 잘 되는 아이가 제 엄마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 어느 날은 예쁜 들꽃을 들고 와 그녀를 기쁘게 했다. 여인의 표정이 날로 밝아졌다. 그동안 메마르게 살아온 여인이었다. 푸근한 남자를 만나서 정이 담뿍 들어가는 표정을 보는 게 좋았다. 그녀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그렇게 언제까지 친구만 하기엔 현실이 용납하지 않아 문제였다. 또 비자 만료일이 다가오니 속이 타들어 갔다.

 “저 샘 할아버지와 결혼하고 싶어요. 친정아버지처럼 모시고 살면 되겠죠.”

영주권만 받을 수 있다면 나이 같은 건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부인과 이혼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는 할아버지는 재산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위아래 층에 따로 산다고 했다. 긴 세월 함께 살던 부부가 남남으로 갈라져서 한 지붕 밑에 살고 있다니. 우리 문화와 달라도 너무 달라 웃음이 절로 났다.

“급한 사람이 먼저 말을 해야지. 잘해 봐요.”

샘 그는 어떤 생각일까? 궁금했다. 여기 사람들은 정식 결혼보다 동거를 희망하는 편이라고 들었다.

먼저 들어온 불법 이민자들이 더럽혀 놓은 사례들이 많아서 현지 사람들도 이제는 경계가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그녀는 밤잠을 설치며 고심했다. 샘이 무슨 맘으로 자기를 가까이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말을 잘 못해서 게도 구럭도 다 잃을까 봐 걱정되었다.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영주권만 아니라면 지금처럼 사는 게 너무 좋은데.

그녀의 주차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요즘 단속이 심하다는데 또 굴을 따러 갔구나 하는 마음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친정엄마가 딸을 챙기듯이 돌아올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서성댔다.

 밖에서 차 소리가 났다.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저 오늘 죽고 싶어요.”

비통하고 처절한 목소리였다. 방문을 꽝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렸다. 따라 들어가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온종일 두문불출해 미용실 손님들도 돌려보내야만 했다. 작심을 하고 영어가 부족한 부분은 사전을 들춰가며 종이에 적어 그의 집으로 달려갔던 여인. 그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따뜻한 차 한잔으로 여자를 안심시켰다.

모든 것 다 덮어버리고 그의 품에 덥석 안겨서 넋을 놓고 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가슴 넓은 아버지 품에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삶을 한껏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그럴 수 있는 형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용건을 털어놓았다. 써서 가지고 간 종이쪽지를 펴 보였다. 그녀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굳어버린 표정으로 그는 말없이 오래 서 있었다. 울고 있는 여인을 일으켜 세우며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열 때까지의 시간이 한없이 길었다. “예스”라는 답이 나오기를 맘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답은 그 반대였다 “노오.” 대답은 단호했다. 자기는 시한부 삶을 사는 처지라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녀는 괜찮다고 애원을 했다. 이성을 잃고 몸부림치듯 매달려 보았다는 여인.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노 같은 게 치밀었다. 한국에 가서 살면 될 걸 왜 그리 치사하게 살아야 하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도 없었느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녀가 그 집을 뒤로하고 달려올 때는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정신없이 달렸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 일에서 벗어나기까지 그녀는 맘고생을 많이 했다. 더러운 게 정이라더니 정 끊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처럼 따뜻하게 품어준 시간이 아쉬웠다.

그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감정의 사치일 뿐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도 다시 태연한 척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닌가. 그의 인생이 참 불쌍했다.

 사정을 모르는 아이는 샘 할아버지가 왜 안 오느냐며 날마다 기다렸다. 엄마 보고 같이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자고 보채기도 했다. 적당한 대답을 못 찾아 우물거리는 엄마 대신 옆에서 한마디 거들어주었다.

“할아버지 먼데 여행가셨대. 아주 오래 있다가 오신단다.”

 

그녀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서 더 씩씩한 척 살았다. 조용한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집에 낯선 남자 손님이 생겼다.

어느 일요일, 교회에 갔던 그들 뒤에 낯 모르는 한 남성이 따라왔다. 이란계 키위(뉴질랜드 사람)라고 했다. 한국 여성을 만나려고 많이 찾아다녔단다. 그는 뉴질랜드에 이민 오기 전 이란에 살 때 한국 근로자와 같이 일을 했었다. 가끔 그들 집에 초대를 받아가면 한국 여성들의 남편 섬기는 모습이 너무 좋았단다. 결혼하게 되면 꼭 한국 여성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고 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태극기를 보았다. 반가워서 한달음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한인 교회였다. 목사님을 찾아 자기 마음을 털어놨다. 목사님은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그를 정신병자로 오해하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지치지도 않고 날마다 와서 졸랐다. 목사님이 그의 진심을 알고 거처를 물어 뒷조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영주권자가 분명하다는 사실까지 확인한 목사님. 하나님께서 그녀의 짝으로 보내셨다고 믿었다. 그들은 그렇게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할머니 죄송해요. 함께 살고 싶은데 제임스가 아니라네요.”

 그녀가 늘 하던 말이었다. 시집을 가더라도 우리는 헤어지면 안 된다나. 맘이 고마워서 대답은 했지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남의 신혼에 무슨 초침맛으로 끼어들까나. 슬며시 자존심이 상했다.

“어이구. 가자고 빌어도 안 갈 거네. 걱정하지 말고 자네나 가서 제발 잘 살아.”

진심이었다.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 살림을 차렸다. 우리는 그렇게 이별의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순종하는 아내를 원하는 남자. 왠지 불안했다. 그녀의 스타일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는 모습도 볼 겸해서 머리 손질을 핑계 삼아 찾아갔다. 집 안이 깔끔하고 신혼집다워 마음이 놓였다. 세 사람이 커피를 마시며 잠깐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인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밖에 미용실 손님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의 표정이 금방 일그러졌다.

 함께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어 기분이 나쁘다고 하소연하듯 거칠게 말을 했다. ‘큰일이네.’ 걱정이 되었다. 미용실이라고 만들어놓은 모양새가 볼썽사나웠다. 남편이 원하지 않는 일을 혼자서 만들었다는 표시가 뚜렷했다.

집 바깥벽에 어지러운 헝겊때기가 얼기설기 천막을 대신했다. 포장 안을 들춰보니 하늘에 반사된 거울이 눈을 찔렀다. 그 앞에 덩그러니 의자 하나가 앉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폐허 속 어느 전쟁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미용실 풍경이었다. 멀쩡한 집 외관을 흉하게 만들어 놓은 여인을 좋아할 남자는 없을 것이 뻔했다. 그녀가 포기할 수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아들을 위해서 벌어야만 했다. 남편이 아이까지 책임지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했어도 절대 행복하지 않은 그녀. 마음이 짠했다. 바람을 타고 안 좋은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남자가 폭력을 써서 도망 다니기가 일쑤라고들 수군거렸다. 순종하는 아내를 원하던 남자였으니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린 사람들이 부부의 연을 잘못 맺었다.

그녀의 목적은 여자의 행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들 하나 잘 키우는 게 엄마로서 인생 최대의 목적이었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영주권자. 그것이 전부였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때는 보호 시설에 요청도 했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한 달을 지낼 수 있었다. 그동안에 남자의 자성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과를 하고 반성하겠다는 각서를 받고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남자는 정상인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무슨 지병을 가졌는지 일도 못 하고 환자수당으로만 살아간다고 했다. 그 사실은 솔직하게 털어놔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더라도 같이 놀아만 달라고 보채는 남자를 감당하기에는 현실이 여의치 않았다. 아들의 뒷바라지를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처지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남자는 불만을 폭력으로 달랬다. 폭력의 빈도가 잦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도망쳐 나오고 싶었지만 버텨내려고 입술을 깨물었다.(여기서 나가면 이제는 끝이다. 어떻게든 그날까진 참아내자.)

  2년이란 세월이 수십 년처럼 길고 지루하게 지나갔다. 그녀가 원하던 영주권을 손에 쥔 날 그녀는 혼자서 바닷가에 나가 펑펑 울었다고 했다.

인간은 양심의 동물이라는 게 맞는 것 같다. 막상 영주권을 손에 쥐니 남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이제부터라도 잘해 주고 잘살아보자.)

 얼마 동안은 조용하게 잘 지냈다. 그것도 잠깐, 남자의 손버릇이 다시 시작되었다. 모자가 다시 보호기관을 찾았다. 그만 살고 싶다는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어느 날 경찰 보호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짐을 몽땅 꾸려 들고 집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이제 당당한 영주권자다. 쫓겨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모든 고난에서 해방된 홀가분함에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

 

어느 날 쇼핑몰 근처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모녀의 상봉처럼 우리는 뜨겁게 껴안았다.

“할머니.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맛있는 거 해 드릴게요.”

전화번호와 주소를 적어주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해서 약을 사러 잠깐 나왔다고 했다. 농장에서 고추를 따다가 뛰쳐나왔다는 차림은 옛날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음이 나왔다.

“ㅇㅇ야. 할머니….”

차에서 내리는 녀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덟 살짜리가 의젓한 고등학생으로 자라 몰라볼 지경이었다. 세월이 참 많이도 흘러갔구나. 아들 잘 키웠다고 이혼한 아이 아빠에게서 용돈도 좀 온다고 자랑을 했다. 아이가 곧 대학을 간다고 대견해 하기도 했다.

내가 그 집에 가봤으면 더 많이 자랑할 말이 있었을 것만 같았다. 자랑해도 된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아냈으니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룬 것이었다.<끝>